존스 홉킨스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신고전학파의 시장 자유주의는 이제 대체할 수 없는 경제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자유주의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확산됐다. 신고전학파의 이론은 80% 옳다. 그러나 나머지 20%의 진리는 바로 사회구성원 간의 ‘신 뢰’다.”
5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96년 7월2일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발원한 아시아 금융위기의 태풍이 북상, 그 해 겨울엔 한국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스는 연일 1면 기사로 한국 정부와 기업, 금융 기관의 유착관계를 질타하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회계 투명성을 높일 것을 요구했다.
그때 한국을 향해 쏟아 부었던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회계관행’등의 용어가 또다시 미국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이번엔 그 대상이 미국 기업이다. 지난해말 에너지 그룹 엔론의 파산 이후 얼마나 많은 미국 기업들이 분식회계와 내부자거래, 탈세, 가격 담합, 주가조작 등으로 미국 금융감독당국(SEC)의 조사를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IBM과 제너럴 일렉트릭(GE), 제너럴 모터스(GM) 등 미국의 간판 기업마저 회계 부정 루머로 시달리고 있다.
미국 경제는 지금 심각한 ‘신용 위기’에 빠져 있다. 뉴욕 월가에는 “지난해 9.11 테러가 외부 세력에 의한 폭발(explosion)이라면, 엔론 사건으로 인한 신용의 위기는 내부의 폭발(implosion)”이라는 말이 있다. 올 들어 거의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기업인과 금융인의 화이트컬러 범죄가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치명적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기업 범죄 문제를 언급하지 않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9일 뉴욕에 와서 강경 대응방침을 밝힌 것은 현재 미국 기업과 금융계가 병들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엔론에서 시작된 화이트컬러 범죄는 지난 90년대의 장기 호황의 산물이다. 10년 동안 주가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최고경영자들은 엄청난 스톡옵션을 챙겼고, 그 부를 불리기 위해 뉴욕 금융 가와 유착관계를 맺었다. 주가를 부풀리기 위해 회계를 조작하고, 이를 앤더슨과 같은 회계회사가 도와줬다.
지금 미국의 기업 범죄는 1929년 대공황이래 최대 규모라고 한다. 대공황 때는 당시 금융계의 황제 J. P. 모건 가문의 주가 조작 사건을 비롯 대형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증시가 장기침체에 빠졌고 경제가 10년 이상 가라앉았다. 대공황은 2차 대전이 터지면서 전쟁 특수에 의해 가까스로 해결됐을 뿐이다. 현재 미국 경제가 앓고 있는 신용의 위기는 주가하락을 촉진시키고, 투자 위축, 소비 둔화, 경기 회복 지연의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나리오가 이어질 경우 연초에 회복의 싹이 돋던 미국 경제는 다시 꺾일 가능성이 크다.
후쿠야마 교수의 지론을 빌리자면,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 지배에 성공했지만 이제 나머지 20%인 신뢰의 문제로 기우뚱거리고 있다. 이 20%의 신뢰가 무너질 경우 80%의 미국 시장 경제가 통째로 붕괴될 우려가 있다. 미국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여하에 따라 또 다른 불황의 우려를 잠재우고, 국제사회의 리더십을 다시 찾는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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