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던 90년대 초반 고르바초프 시대에 필자는 모스크바를 다녀왔다. 철의 장막으로 가려졌던 공산제국의 허상이 드러나면서 소련은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걸어 그후 연방이 해체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당시 소련인들은 미국에서 온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성조기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고 사업가들은 물론 정치인들도 미국에 연줄을 대려고 애썼다.
소련 뿐 아니라 미국은 한때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위력이 대단했다. 세계 2차대전 때 독일에 짓밟혔다가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에서 이긴 서구에서는 미군이 해방군으로 대접받았다. 그래서 미국이 국제정치에서 힘을 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 미국문화가 유럽에서 매력을 끌게 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의 힘은 더 대단했다.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켜 한국을 해방했고 6.25전쟁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 그 후 경제복구와 안전 보장으로 한국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이주하여 지금의 재미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졌던 미국이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사람들은 소련의 붕괴로 동서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국인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예견했지만 실은 소련이 없는 미국도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계가 동서로 갈려 있을 때는 서구등 자유진영이 미국의 힘을 필요로 했지만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렬해졌다.
어느 나라든지 다른 나라의 영향력의 지배를 받으려고 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할 경우만 다른 나라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게 될 뿐이다.
동서 냉전시대에 미국의 힘이 세계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이와같은 불가피성 때문이었고 이러한 지배는 반면에 저항감을 길러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힘이 필요없는 상황이 되면서 반미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점증하게 된 배경에도 이런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미국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미국 자신의 잘못 때문인 점이 크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은 수많은 국제분규에 군사적, 외교적으로 개입했으나 언제나 득보다 실이 많았다.
특히 중동문제에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미국은 이와 같은 모순을 경제력으로 덮어왔으며 경제력을 내세워 다른 나라의 추종을 이끌어 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경제력 마저 힘을 잃을 위기를 맞고 있다. 3년째 내리막길을 달리던 미국 증시가 최근 대기업의 회계부정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미끌어져내리고 있다.
이같은 금융 불안이 미국경제를 붕괴시키고 미국의 국력을 쇠퇴시킬 것인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반미주의로 물들어 있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오만한 제국’ 미국이 망하고 있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상당히 어려운 때이다. 지난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는 테러 때문에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경제문제가 더 걱정거리이다. 미국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미국 경제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미국경제가 무너진다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더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은 미국이 기침하면 세계가 몸살을 앓는 세계경제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미국경제의 악화로 인해 우리의 생활여건이 악화된다는 점과 미국경제의 추락으로 인한 재미한인의 위상 추락이 당면한 걱정거리이다.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다리로 서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느 한 나라의 위상이 흔들릴 때 우리의 위상도 흔들리게 되고 어느 한 나라가 추락하면 우리의 위상은 추락하고 만다.
한국과 미국이 세계인의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게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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