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살해하려 했던 사육신은 당시 최고의 역적들이었다.
이 사건에 가담했던 사육신과 그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잡혀 죽었고 여자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조의 후손들인 역대 국왕들은 사육신의 충의를 높이 평가했다. 200여년이 지난 숙종 때는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었고 사육신이 처형된 노량진에 민적서원이 세워지고 신위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적 평가는 당대의 평가와는 다를 수가 많다. 히틀러는 나치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세계를 제패하는 독일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으나 오늘날 그는 최악의 살인마로 낙인 찍혀 있다.
안중근은 일제가 볼 때는 테러리스트였으나 해방 후 한국 독립운동사의 최고 위인으로 기록되었다. 생전에 핍박과 고통속에 살았던 많은 종교지도자와 사상가들이 사후에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다.
지난 몇 십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도 변화무쌍했다. 전두환이 일으킨 12.12사건이 당시는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했지만 후일에 군사 반란이란 오명을 면치 못했다.
5.18 당시 폭도로 불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민주투사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떤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빚었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사람이 역사 발전에 어떤 공헌을 했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정리된 과거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시대의 역사 기록인 실록은 왕의 사후인 후대에 기록된 역사이다. 실록의 기초 자료인 사초는 당대의 사건과 정사 내용에 대한 일지, 그와 관련된 문헌 등인데 국왕들 조차 이 사초를 볼 수 없었고 따라서 편찬 내용도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권력이 사관들의 역사 편찬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었다.
역사는 과거이고 권력은 현재이다. 그러므로 권력이 역사가 될 수는 없다. 권력이 과거가 되어야만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권력이 역사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런 과거와 현재가 혼동된 한국판 교과서 사건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
말썽인 즉, 고교 국사교과서에 DJ정부의 업적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 중 ‘민주주의 발전’이란 부분에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잘잘못이 비교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비해 김대중 정부의 업적만이 실려있고 ‘남북 화해와 교류’ 부분에서 김대중 정부의 공적을 크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과거라고 한다면 누구를 잘 다루고 누구를 잘못 다룬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재의 사건과 사람을 과거의 역사로 억지로 처리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DJ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확실히 색다른 일을 했다. 정상회담을 했고 대북 접근 정책과 북한을 돕는 정책을 썼다. 누구나 자기의 한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듯이 정부가 이 정책을 잘한 일로 내세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다르다. 역사적 평가는 일을 한 사람들의 소임이 아니라 후세에 내려지는 것이다.
남북 접근으로 북한을 도운 일이 남북통일의 기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북한을 이롭게 하여 적화통일의 발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남북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역사는 그 결과를 보고 DJ의 햇볕정책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DJ는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는 조소까지 받아가면서 기어코 대통령을 했고 재야 때부터 그렇게 원하던 노벨상도 탔다. 그러나 역사에까지 스스로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길 수는 없다. 그것은 산 사람이 스스로 송덕비를 세우는 것처럼 그 자체가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한국판 교과서 파동은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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