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LA 폭동 이후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문화활동이 갑작스레 맹렬하게 왕성해졌다. 나는 그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그 폭동 때문에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들이 겪었던 정체성과 자기 표현의 위기에 있다고 본다. 폭동 기간 한인들은 흑색, 갈색 인종들의 분노의 타겟이 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자신과 자신들의 재산 외에는 아무 것도 안중에 없는 빈민가의 욕심 많은 상인들로 선전되어졌다.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들, 특히 1.5세들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나 상상을 통한 한국인과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이야기로 자신들의 모습을 정의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는 것은 미국인들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을 공산주의에서 구제할 수 없었기에 용감하게 노력해서 창녀들을 구하고 고아들을 입양했다는 정도이다. 그 창녀들의 몇몇은 이제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책과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천의 한국 어린이들이 지난 35년 동안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으나 최근까지 입양 이야기는 곧 백인 미국인들의 관대함과 동정, 위대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입양아들이 자라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의 주제는 입양아들이 한국에서 자신들과 피를 나눈 가족을 잃어야했던 상황과 그들을 구제했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소외이다.
주류 미국 독자들은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이 이러한 망령과 얘기들을 불러내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이국적이고 다소 열등한 문화를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문화적 통역가이길 바란다. 또한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은 한국계 미국 문학에서 조국의 자취를 찾기에 급급한 한국의 독자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궁지에 몰리고 있는 듯 싶다. 초기 중국과 일본의 독자들이나 관객들처럼 그들은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이민가지 않은 자신들을 축하하기 위한 이유로 한국 이민들의 실패와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불안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작품의 핵심은 인종, 종족, 성별, 성향, 사회계급등 그들 자신의 미국에서의 경험이다. 우리는 새로운 미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변화와 재구성의 가능성을 현대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파묻힌 얘기와 이미지들을 들어내어 국외에서 자애로우며 국내에서는 포괄적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계속 경계를 넘어서기도 하고 경계를 지키기도 하며 뒤섞인 미국과 한국적 삶의 요소들로부터 새롭게 접목된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묶어주는 끈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어떻게 닳아서 해체되며 다시 묶여지는가를 극화하기도 한다. 이것이 코리안 아메리칸 작가들이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방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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