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베를린을 거쳐 로마를 다녀온 적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관광지로 개방되었고, 주변엔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흐트러져 있었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세계를 동과 서로 갈랐던 냉전시대가 끝났으므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평화의 국제질서가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을 쏟아냈다.
브란덴부르크 광장 벤치에 젊은 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젠 더 이상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로마에 도착한 날은 휴일이었다. 지도를 한 장 들고 바티칸 궁전에서 콜리시엄을 지나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중심지였던 포로로마나를 둘러보았다. 주마간산 격으로 로마를 훑으면서 생각한 것은 2000년 전의 고대제국의 역할을 오늘날 누가 대신할 것이냐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미국일 것이다. 그 후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점에서 로마와 미국이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를 했다. 그러면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로마나’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차이점은 무언가.
지난해 9월 뉴욕과 워싱턴이 테러 공격을 받은 후 미국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마침 영국의 채널4 TV가 로마 제국을 주제로 한 시리즈물을 방영하자, 미국과 로마를 비교하는 논평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사용언어가 세계어이고, 다양한 인종을 포용하고 있는 점에서 로마제국과 공통점을 갖는다. 로마 제국이 식민지 지배를 현지인에 위임했던 점은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은 제국주의는 아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또는 준 식민지에 모국의 영향력을 직접 행사한다. 제국주의는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고, 위임통치자를 마음대로 교체하며 통치를 강화한다.
미국은 이런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수퍼 파워’일 수는 있지만, 제국주의로 분류될 수 없다. 미국은 독일에 수만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얼마 전 총선에서 독일의 어느 장관이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히틀러에 비유해도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는 충돌을 벌이고 있지만, 미국은 양자간 대화를 중재할 수 있을 뿐, 전쟁과 테러를 종식시킬 힘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초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셉 나이 학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로마제국이 망한 이유로 외부(게르만족)의 공격과 내부의 부패 등 두 가지를 들었다. 지난해 미국이 테러 공격을 받았고, 엔론 사건 이후 연이은 기업 부정사건이 터졌으니, 나이 교수의 정의에 따라 미국은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나이 교수는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하드 파워’의 사용을 지양하고, 문화와 이념 등 ‘소프트 파워’로 많은 나라를 설득함으로써 세계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지만 모든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지 못하는 패러독스를 설명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한때 친미 정권이었고, 오사마 빈 라덴이 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지만 반미로 돌아섰다. 그러나 반미주의자였던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미국에 대화하자고 제의한 것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미국이 지나치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저항이 거세지고, 더 많은 무력을 유지함으로써 그 결과로 로마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커진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지금 초기에 와있는지, 말기에 와있는지는 미국이 대외정책을 어떻게 취하느냐에 있다고 본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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