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창가로 무더위가 한풀 꺾인 부드러움 역시 살며시 들어온다.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가을이던가. 방학을 맞아 집에 있던 딸과 오랜만에 동네 입구에 있는 할인매장에 가기로 한 아침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오르락내리락 매장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시선을 붙드는 한 젊은 남녀가 보인다. 이십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남자의 한쪽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남자는 뭔가 계속 말을 하며 여자 옷 코너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아! 그녀가 눈이 불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궁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들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의 손에는 몇 벌의 옷이 들려져 있고 다시 데님으로 된 스커트와 재킷을 들어 보이며 “얼른 들어가 입어봐. 내가 봐줄게“ 하며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한 벌씩 입을 때마다 쑥스러운 듯 주춤거리며 입구로 나와 “오빠, 어때요?” 하면서 “정말 예쁘다” 또는 “그건 좀 안되겠다” 하면서 사랑스러운 듯 봐주곤 한다.
그러기를 몇 번, 남자는 데님 스커트와 재킷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 다시 입고 나오게 하더니 “한 번 돌아볼래” 그녀는 춤추는 인형같이 웃으며 빙글빙글 돈다. “음, 길이도 괜찮고, 품도 딱 맞고, 아하! 소매가 약간 긴 것 같은데” 하며 꼼꼼하게 소맷자락을 안으로 집어넣어 보고는 “야! 진짜 예쁘다” 하며 웃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오빠, 정말? 그럼 됐다” 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눈이 되어주고 있었다. “엄마, 뭐 하세요?” 뭉클한 마음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응 있잖니…”하고 방금 본 두 남녀의 얘기를 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텔리비전을 켜니 마침 월드컵대회가 한창일 때 녹화한 방송인 듯한데 앞이 잘 안 보이시는지 눈을 감고 지팡이를 앞에 놓으신 채 텅 빈 경기장 밖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손뼉을 치고 계신 할머니 한 분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보인다.
“할머니, 지금 응원하고 계신 거예요?” 부끄러우신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시면서 “그래유, 대한민국이 이기려면 이렇게 나 같은 늙은이 한 명이라도 더 응원을 해야지유!” 하시며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치아가 빠져 발음은 잘 안되시지만 정말로 열심이신 할머님을 뵈오니 나는 다시 낮에 본 두 남녀가 생각이 났다.
오늘 하루는 초가을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의 작은 미소를 배운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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