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으로 200마일을 가면 리들리와 다이누바라는 소도시가 있다. 1903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4년 계약 취업이 끝난 동포들의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했다.
사과 복숭아 살구 포도 등을 생산하는 리들리에서 김호(서울 출생, 1885-1978)씨는 18개의 묘목을 개발, 500에이커의 농장을 소유하고 1930년대 150만달러의 재산을 지닌다. 그는 통역과 경영 능력이 탁월한 김형순(경상도 출신, 1886-1979)씨와 동업으로 과일 생산 포장 판매회사를 건립하여 많은 한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해 냈다.
그의 둘째딸 루프씨와 독일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김호씨의 아들 김경원씨가 결혼하여 사돈까지 되어 평생 이웃해 살았다. 그 아들이 지은 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저택을 짓고 4일간 판검사, 시·주의원들을 초대하여 집들이를 한 것은 동양인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였단다. 지금은 일본인 소유. 그 당시 모국의 손기정 같은 유지들이 유했다는 넓은 집 가운데에는 팜트리 두 그루가 기도하듯 서있다. 그 저택을 중심으로 엄청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내곤 했다.
숲 사이의 킹스강,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른다. 그 시절 한인들이 목욕을 하고 쉬던 곳이다. 지금은 조용한 주택지 앞 넓은 잔디 위에 공동묘지가 있다. 미국인들 묘지 사이로 옹기종기 반가운 한글 묘비가 보인다. 김호·김형순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는 주위로 대한 평남 순천 석청리 출생 김평일(1938년 사망), 익션 김(1947년 사망) 경상도 코리아, 서창묵, 2차대전 참전(1969년 사망) 피터 안. 자녀를 둔 이들은 윤이 나는 묘비에 <귀한 어머니 잘 쉬옵소셔, 대한민국 셔울 리의순(1900-1959), 귀한 아버지 리사령(1892-1966)>이라고 새겨졌지만, 군데군데 벽돌 크기의 돌 조각에 새겨진 이름 석자는 총각으로 살다간 이들이다.
리들리에는 이승만이 만든 동지회와 거리를 둔 대한인국민회 쪽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이 다니던 작은 교회에 가보았다. 지금은 라틴계 교회가 되어버린, 백의민족 하얀 건물 꼭대기 십자가는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지금은 후손들이 200마일 남쪽 LA로 이사가 버리고 그들이 심어 놓은 무궁화, 감나무, 살구나무가 목사관으로 들어서는 통로에 고아들처럼 서 있다. 그 당시 김형순씨가 내놓은 땅에 한인들 손으로 1938년에 세워진 교회다. 라틴계 목사는 가끔 낯선 한국 노인들이 입구 층계에 앉아 있다가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연을 물어 보면 그 앞에서 뛰어 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 LA에서 왔다는 것이다.
프레스노 대학 차만재 교수, 박성국 전 한인회장 등이 이제 이민 100주년을 맞아 교회를 사들여 유적지로 만들 운동을 펴고 있다. 길 건너 중국집은 밖에서 보기보다 넓었다. 이민 초기 총각들이 놀음도 하고 술도 마시며 유일하게 피로를 풀던 장소였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동지회파 한인들은 7마일 떨어진 다이누바에 몰려 살았었다. 중심 인물이던 송철씨는 학창시절 국민회 김형순씨 농장에서 일을 했고 후에 다이누바에서 농장을 하면서 이승만을 적극 도왔다. 애국여성단이 창설된 1921년에 설립된 교회는 불과 3년 전에 헐려지고 현대식 경찰서 건물이 들어섰다. 도심의 외각지대, 멀리 세코야 산맥을 바라보는 이곳 묘지들은 한적한 들판에 있다. 산을 넘어 달려온 바람은 열병식을 하는 포도밭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가 귤밭으로 숨는다.
두 마을로 갈라져 말도 않고 지내다가도 조국의 일에는 하나가 되었던 이들, 그들 묘지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코야 바람처럼 조용하지만 날렵한 바람처럼 살았던 그들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음이 후손으로서 부끄럽다. 미국을 찾는 모국의 어정쩡한 지식인, 정신 못 차리는 정치인들의 순례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재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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