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뉴욕에서 처남의 장례식이 있었다. 61년을 이 땅에서 살다 간 처남은 참 바람처럼 산 사람이었다. 별다른 재산도 미련도 남김이 없이 멕아더 장군이 곰 사냥을 즐겼다는 베어 마운틴의 단풍이 무척 고운 10월에 훌쩍 떠났다. 고인의 잠든 얼굴이 맑고 홀가분해 보였다. 관 옆에 세워진 고인의 사진은 그가 평소에 그렇게 운전하기 좋아했던 스포츠유틸리티 차량과 더불어 여행복 차림으로 어느 공원에서 찍은 것이었다. 밝은 자연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거운 장례식의 분위기를 씻어내어 주었다. 내 장례식에도 저런 사진이 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암이었기 때문에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아내는 많이 슬퍼했다. 나도 동기간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소멸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숙연해졌다. 아직 문상객들이 도착하지 않은 시간, 열린 관 뚜껑을 통해 고인의 얼굴이 바라보이는 가족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내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죽을 때 누구에게 가장 미안할 것 같아요?"
때가 때이고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 질문은 나를 한참동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당신이겠지." 어차피 가장 미안할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럴 거예요. 그런가 봐요."
깊은 긍정과 함께 아내가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오빠가 죽고 나서 다음 날 그 부인의 꿈에 나타났단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신랑처럼 아주 깨끗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얼굴도 젊고 곱게 단장한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만 아무 말 없이 그 부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그렇게 울더란다. 그 말없는 얼굴이 그렇게 "미안해, 미안해" 하더란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오빠의 부인을 위로하는 말로, "그렇죠. 오빠가 언니에게 미안한 일 많이 했죠. 언니가 고생 많았어요" 라고 동의해주자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아니에요, 아씨. 나 고생한 것 하나도 없어요. 오빠가 내게 얼마나 잘 해 줬는데요." 했단다.
평소에 처남의 삶이 어떠했고 그 부인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대충은 알고 있던 나도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처남은 무척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았지만 평생을 별로 생산적인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긴 것은 취미로 모아놓은 250여 대의 카메라들밖에 없었다. 대신 다니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기질대로 1960년대의 한국에서부터 승마, 수영, 등산 등등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산 사람이었다. 십 수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온 후로는 더욱 이 넓은 땅을 두루 다니기를 즐겨했다. 암으로 투병하던 말년에도 그가 한 해 동안 운전한 거리가 무려 6만 마일이나 되었다. 사람 사귀기 좋아하고 대접하기는 좋아했지만 유독 그 부인에 대해서는 미련하다고 평생을 놀리고 윽박지르고 투정했다. 그런 투정이 아예 말버릇이 되었다. 얼굴도 수수하고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수더분한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이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것을 수모로 생각하지 않고
한결같이 순하고 편하게 남편을 받들었다. 마치 깊은 숲 같은 여인이었다. 무엇이 던져지던지 품어버렸다. 퉁겨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앙금처럼 남기는 것도 없었다. 남편은 그런 부인의 성품이 오히려 답답해서 더욱 윽박질렀겠지만 그렇게 평생을 사는 동안 결국은 자기가 몽땅 그 깊은 숲에 안겨버린 것 같았을 것이다.
나중에는 얼마나 편했을까. 그 편안함을 투정으로 일관해 온 자신이 얼마나 바보처럼 여겨졌을까. 그리고 그 부인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나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나도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내도 그래서 "그럴 거예요. 그런가 봐요."라고 끄덕였을까. 조금은 마음이 복잡했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기에 그냥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 고생한 것 하나도 없어요.’ 좋았던 것만 기억하는 부인.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깔끔한 성질이 누그러지지 않아서 병실의 침대 시트를 병원용이 아닌 개인용으로 수시로 갈아달라고 성화를 부리던 남편이었지만 그런 모습이라도 오래 있어주기를 원했던 아내. 그 남편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너무 커서 상실감을 어찌할 줄을 몰라 슬퍼하는 미망인.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60줄의 그 여인의 얼굴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내 아내가 내게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어차피 미안한 일이야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마는 할 수만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미안해야 할 일들을 줄여 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을 주었다. 마주잡은 아내의 손에서도 힘이 실려왔다.
"사랑하는 아빠에게-국희, 국찬, 국현" 자녀들의 이름으로 된 화환이었다. "사랑해요-영자, 영수, 영숙" 형제와 자매들의 인사였다. 화환의 인사처럼, 미망인의 가슴처럼, 우리네 인생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인가보다. 비록 가는 사람은 미안함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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