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이면 가끔 뉴욕에서 두어 시간 거리인 야외로 나갈 때가 있다.
지난 달 초에는 모홍크 가는 도로 위에 바람결 따라 와르르 떨어져 굴러다니는 갈색 단풍들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근 한 달만에 다시 뉴욕 근교로 나가니 그 많던 잎들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늠름하게 서있어 그것도 보기 괜찮았다.
아무런 장식 없이 맨몸으로 서있는데도 품격 자체인 것이, 그 소박함이 자존심과 긍지와 근원을 말해주는 까닭이다. 잎도 열매도 없이 하늘 높이 두 팔 치켜올리고 경건한 삶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은 마치 스
위스 태생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철사, 나무, 끈 등으로 가늘고 긴 인체를 표현한 자코메티의 조각은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부피도 무게도 사라지고 마침내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성냥개비같이 끊어질 듯 가냘프게 앙상한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은 끈질긴 생명력을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양심과 극도로 압축된 자기 세계만 남긴 채 살덩어리와 기름끼는 모조리 제거된 그 모습. 한때 무척이나 그 화가를 좋아했었다. 메마른 나뭇가지지만 저 마른 가지 속에는 내년 봄이면 다시 싹 틔우고 꽃을 피워 올려 열매를 맺을 수액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폭설이 내리면 툭툭 가지가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당당한 자존심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붉은 꽃과 초록이 무성한 들판도 좋지만 이렇게 갈색과 재색으로 남은 들판은 사색적이어서 또 좋다. 만고풍상을 겪고 초연하게 가라앉은, 할 말 많으나 꼭 말로 해서만 말이 아닌 것이 그 많은 말을 다 삭여낸 인고의 세월 같기 때문이다.그리고 군더더기가 없어서도 좋다.
바삭 말라 발치에 쌓인 낙엽과 앙상한 나무들은 거짓과 허풍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으로 점철된 인간보다 낫다. 그래서 흔히 자연은 사람에게 당한 상처를 보상하고 위로해준다 한다. 매일매일 복잡하고 정신없이 살면서도 자연 속을 말없이 거닐다보면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머리끝까지 올라오던 분노도, 너무 미워 다시는 만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자연의 넓은 품에서는 용서가 되고 모든 애증과 갈등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하는 빈 마음으로 뉴욕시로 돌아오는 귀가길이었다.조지 워싱턴 브릿지를 건너며 E-Z Pass대에서 ‘Paid’를 확인하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장이나 받은 E-Z Pass 벌금 티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달 전, 어느 쪽 과실인지 몰라도 계속 E-Z Pass를 사용하다가 톨비가 50센트인 곳에서 ‘얼마 안되니까 현금으로 내자’고 하여 분명 낸 톨 비가 안낸 것으로 기입되어 벌금 25달러가 부과되어 날아온 것이다.그러니 시비를 가려달라는 편지를 보내야 하는 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눈앞에 놓였다. 명백한 내 잘못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살다보면 ‘이게 아닌데?’ 할 때가 있다.
실컷 바깥바람 쏘이면서 ‘아무 것도 아니야. 긴 세월 속, 먼지 같은 일이야’하고 세상사에 달관한 초인의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내가 사는 동네가 가까워지자 세속적인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불과 하루도 안지나 사소한, 지극히 작은 일에 목숨 걸 일도 아니면서 짜증을 내다니, 때로 그런 일상사에 휘둘려 기분이 상해야 하는 것에 더욱 자신이 한심해 진다.
마흔이 넘은 나이는 그 끓어오르던 열정을 다스리고 다듬어지는 나이라서 좋다는데 왜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사소한 것에 노염을 타는지. 세상사에 미련이 많아서 도를 닦으려면 한참 멀었다싶다.(밀린 벌금 티켓, 음주 운전 조심하세요. 차 토잉 당합니다. 뉴욕시가 재정악화로 연말비상
인 것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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