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계미년이 시작됐다. 해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9·11테러 후유증과 경기침체 탓인지 신년의 들뜬 기운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외신에 찍혀 나오는 올해 미국의 화두 역시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안보와 경제다. 이들은 2004년의 선거에 대비, 부시 행정부가 사력을 다해 씨름해야 할 계미년의 핵심 과제다. 공화당 정부가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느냐에 따라 내년에 치러질 차기 선거의 판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외신기사를 담당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연 이라크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개전시기는 언제쯤 될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최근에는 북핵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냐는 문의도 이따금씩 들어온다.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내가 흔들어 대는 ‘산통’은 외신이다. 외신은 ‘이라크전은 시간문제지만 북핵 위기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타결될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는다.
점괘에는 이라크전을 피할 수 있는 한가지 방책도 담겨 있다. 아랍권과 이라크내 저항세력의 힘을 빌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망명을 유도하고, 친미정권을 옹립하는 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비책이란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자, 그렇다면 북핵 위기와 이라크 사태에 관한 점괘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라크와 북한,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국가방위전략을 수정,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는 국가나 집단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이른바 ‘부시 독트린’을 발표했다. 선제공격 가능성을 앞세워 잠재적 위협세력을 눌러놓는 전략이다. 부시 독트린의 1차 적용대상은 물론 ‘악의 축’으로 몰린 국가들이고, 그 중에서도 이라크와 북한이 0순위에 해당한다.
미국의 방위전략은 두 군데의 중요한 국지전을 동시에 수행해 승리를 거둔다는 시나리오에 바탕하고 있지만, 실제로 전선을 쌍갈래로 펼치는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결국 ‘선택’과 ‘집중’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선택의 기준은 당연히 실리다. 미국이 이라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안정적이고 원활한 석유 공급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국가전략 차원의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는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워 위협을 받고 있는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다지고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확보,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암초를 제거한다는 게 부시의 속셈이다.
반면 북한은 사정이 다르다. 핵개발 카드를 이용한 북한의 벼랑끝 외교는 위험스럽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잘 뜯어보면 체제 연명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미국과의 불가침조약으로 체제 안정을 꾀하려는 북한은 미국이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건 타협이 가능하다. 이런 판에 한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인접국 및 전략적 우방국들의 눈치를 거슬러가며 북한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이라크를 대상으로 부시 독트린의 실행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은 체면을 살리고 실리를 거머쥐는 동시에 다른 잠재적 위협국가들에 대해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물론 내년 선거에 이라크와 북한 사태 해결이라는 성과도 내놓을 수 있다.
이라크전의 개전시기는 명분축적과 정치·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고려해 결정될 것이지만 빠르면 3월 이전, 늦어도 올 상반기 이내일 가능성이 높다. 부시 행정부는 북핵 사태를 이라크 공격 전에 매듭짓는 것과 가급적 최대한 늦추는 쪽 가운데 어느 것이 유리한지에 대한 계산을 이미 끝냈을지 모른다. 이 모두가 외신에 기댄 점괘다.
이강규<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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