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의 한 온라인 도박업체가 ‘판’을 벌였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남겨진 ‘잔여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이냐는 화두를 내걸고 전세계의 도박사들을 끌어들인 것.
게임에 참여한 ‘꾼’들의 견해는 1주에서 10년까지 폭넓게 분산됐으나 ‘감’ 좋기로 유명한 영국 프로 도박사들의 베팅은 3주에서 6주 사이에 몰려 있었다.
이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개전 3주만인 9일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후세인 정권은 사실상 패망했다. 아직도 후세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설사 살아 있다 해도 그는 이미 “끝장난 인물”이다.
그러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적대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후세인 미스터리도 풀리지 않았다. 따라서 이라크전 종료를 후세인의 종말 시점으로 잡는다면 3주가 아니라 4주나 5주, 혹은 6주 등을 찍은 도박사들에게 판쓸이를 할수 있는 기회가 돌아가게 된다.
미 국방부는 개전 6주 이내에 이라크전을 마무리짓는다는 내부 시간표를 들고 전쟁에 임했었다. 바그다드가 떨어지고, 북부의 전략요충지들이 속속 무너지는 현재의 전세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예정대로 앞으로 2주내에 부시 대통령의 승전선언이 나올 확률이 꽤 높다. 그러고 보니 영국 프로 도박사들의 ‘감’이 빠르긴 빠른 모양이다.
하지만 프로 도박사들이 아니더라도 이번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띨 것으로 내다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짧으면 2~3주, 길어야 2~3개월이 아니겠느냐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한창 기운이 팔팔한 헤비급 권투 챔피언과 이미 한물 간 라이트급의 퇴물 복서가 맞붙는다면 초반에 KO로 승부가 갈릴 것은 뻔한 이치다. 게다가 미국이 ‘본보기 상대’로 지명한 이라크는 링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심한 ‘영양 실조’를 앓고 있는 상태였다.
91년 걸프전 당시 미군 주도의 연합군들에게 늘씬하게 얻어터진 후 곧바로 유엔의 경제제재조치에 묶여 10년간 군수물자는커녕 식량비축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이라크에게는 미국과의 싸움을 감당할만한 체력이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AP통신의 사진이 한 장 있다. 전쟁발발직후 전쟁터에서 쓰러진 이라크군들의 발을 클로즈업한 사진인데, 이들의 발에는 군화 대신 다 떨어진 낡은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지난 20여일간의 전투에서도 이라크군들은 AK-47 소총과 로켓추진 수류탄으로 최첨단시 설로 무장된 미군의 헬기와 기갑부대에 맞 섰다.
이런 ‘억지 시합’에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시작부터가 문제였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를 묵살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 “설령 적이 공격을 해오지 않더라도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선제공격을 가하겠다”는 부시 독트린을 가동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종반전으로 치닫는 지금까지 미군은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는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다. 화학무기가 정말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 고려가 있어서인지 알수 없으나 이라크군은 궤멸 직전의 처지로 몰렸으면서도 미·영 연합군을 향해 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명분을 ‘입증’하지 못한 전쟁을 통해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라곤 ‘힘이 곧 정의’라는 위험스런 사고방식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제기구는 무력화됐고, 서방권은 주전과 반전 진영으로 나뉘어 분열을 일으켰으며 미국에 대한 아랍권의 분노와 증오는 핵반응을 일으켰다.
정치생명을 건 ‘올 인’으로 부시는 재선의 가능성을 높이는 개인적 소득을 올렸을지 몰라도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로 공인받는 미국의 지도력은 치유하기 힘든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부시는 땄지만 아무래도 미국은 손해를 본 것 같다.
이강규<국제부 부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