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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유명하다. 주정뱅이 형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셔 집안에 술병이 가득했고, 착실한 동생은 돈을 아껴 저축했다. 독일 중앙은행은 전후 복구와 전쟁 배상을 위해 마르크를 무한정 찍어냈고, 그 결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동생은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 거지가 됐고, 형은 술병을 팔아 부자가 됐다는 얘기다. 인플레이션은 이처럼 사회 정의를 왜곡하므로 경제에 암적 요소다. 그렇다면 물가가 하락하면 좋을 것 아닌가. 그런데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기업들은 아무리 많이 팔아도 수익이 줄고, 따라서 직원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줄이게 된다. 실업자가 늘고 소비가 줄어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환율과 이자율, 재정 등 거시 장치를 조절함으로써 통제가 가능하지만, 디플레이션이 악화하면 백약이 무효다. 그래서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보다 위험하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돈을 풀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도 경기 침체가 오래간다. 일본이 15년 가까이 장기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디플레이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기 둔화가 햇수로 4년째에 이르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000년초 5,000 포인트까지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가 1,200 포인트까지 떨어지는 등 자산시장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문턱에 이르렀다. 80년대초 10%에 달했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000년초 2.5%로 떨어지고, 최근엔 0.8%로 하락했다. 아직은 물가 상승률이 낮아지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단계지만,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진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경제의 디플레이션은 오래전에 예고됐었다.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 스티븐 로치는 지난해초에 디플레이션을 경고했고, 지난해 여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내에서 일본형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그런데 앨런 그린스펀 의장만은 디플레이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최근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제기했다. 4월30일 하원 금융위원회 발언에서 그린스펀은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걱정했고, 지난 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통화정책을 디플레이션 예방 정책으로 전환했다.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는 인플레이션과의 투쟁으로 점철돼 있고, 그린스펀 의장은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매파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FRB는 40년만에 처음으로 디플레이션과 싸움을 선언했다. 지금 미국 경제가 70년대 오일 쇼크 직후의 불황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 석유 가격이 떨어져 기업과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일이 됐지만, 역으로 물가 하락을 부추겨 디플레이션으로의 길을 가속화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선택할 거시 정책은 크게 두가지다. 금리를 인하하고, 달러 값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2000년에 6.5%였던 은행간 콜금리가 지금 1.25%로 떨어졌지만, 미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더 내릴 가능성을 흘리고 있다. 미국은 또 약한 달러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해외 물가 요인을 미국 국내에 수입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 달러화와 유럽 공동통화인 유로화의 교환비율은 최근 4년만에 최고인 1.14로 치솟았고, 달러는 앞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그런데 미국이 달러를 떨어뜨릴 때 미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늘리지만, 경쟁국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80년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가 일본 토요다 자동차에 밀렸을 때 미국은 달러 절하 정책을 취해 일본을 꺾은 적이 있다. 이번 타깃은 유럽 회사들인 것 같다. 벌써부터 유럽의 볼보, 다임러사 등은 울상이다.
불황은 경제에 정글의 법칙을 강화한다. 불황기에는 경쟁력이 약한 자는 죽어야할 의무를 지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권리를 가진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미국은 이번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약한 나라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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