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중학동창이 전화를 했다. 그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와 대학시절 미아리 고개에서 자취하던 생각이 났다. 빈속에 들이킨 막걸리 탓이었을까 빙판에 넘어지면서 봉지쌀이 눈 위에 쏟아져 둘이 쪼그리고 앉아 주어 담던 추운 밤, 그 경황에도 낄낄거리던 기억이고 보면 젊음 앞에는 가난도 낭만인가 보다.
하고많은 기억 중에 배고픔이 그리운 추억이고 보면 인생이란 게 별개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배고플 때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그 시절은 너나 없이 넉넉 칠 못했다. 육군장교가 되어서도 피 교육생이면 멀건 국에 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웠다.
수 년 전에 포항 해병사단을 방문했을 때 점심을 사병식당에서 했다. 밥을 두 번 씩 떠다 먹는 이들은 병사가 아니라 해외에서 간 방문객들이었다. “오늘은 특별 메뉴겠지” 옆에 일병 병사에게 물었더니 “이 아저씨가 별걸 다 묻네” 그런 표정으로 벽에 붙은 식단표를 가리켰다. 그 날은 목요일 배식된 대로 미역국에 장조림, 김, 나물무침, 김치였다. 하기야 신병훈련소도 뷔페 식이라고 했다.
사람의 신체는 먹기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입으로부터 각종 장을 통하여 영양분은 빼내고 나면 찌꺼기를 배설 할 때까지, 몸의 위에서 아래까지 어느 것 하나 먹는 것과 무관한 부분은 없다. 얼굴하나만 보더라도 음식을 보고(시각) 냄새맡고(후각) 피부로 느끼며(촉각) 혀(미각)에는 침이 고인다.
오래 살기 위해 섭취해야할 음식의 종류, 량 등 의학적으로 체크하고 조절하는 것은 현대인의 일과며 상식이 되었다. 먹는 습관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가령 자극적인 음식을 계속 먹으면 고집 세어진 다느니, 싫어하는 반찬도 잘먹으려 노력하는 사람은 희생정신이 강해진다느니, 반찬투정만 일삼으면 이기심만 기르게 된다고 한다.
수 년 전 중학 동창들과 유럽여행 중에 기억되는 것은 풍물도 풍물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시시덕거리던 즐거움이다. 가족이 빙 둘러앉아 커다란 찌개에 숟가락을 휘저으며 생선 토막을 낚시질하던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래서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했다. 지금은 인구조사라고 하지만 오죽하면 호구(호수와 식구)조사라고 했겠는가. 그래서 만들어진 게 탕(湯)문화다. 고기 한 근에 물을 잔뜩 붓고 끊인, 설렁탕, 갈비탕을 식솔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 어느 민족 보다 끈끈한 가족관은 함께 떠먹는 식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새로 나온 장수의 비결, 책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포함된다.
지옥이나 천국 모두 진수성찬에 긴 젓가락이 함께 나오는데 자기 입에 떠 넣을 수가 없다. 지옥사람들은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으니 굶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긴 젓가락으로 서로 상대방을 떠 먹인다는 것이다. 음식 앞에서 남을 먼저 생각하는데서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이제 먹을 것이 지천인 세상이다. 대도시 식당에서 버리는 반찬만도 몇 조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식구들은 어딜 가고 혼자 식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정다운 가족 관계도 사라져 간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초라한 식당에 혼자 앉아 그릇을 들고 마지막 국물을 들이키는 노인의 목젖’이라는 시가 있다.
한국 인터넷에는 자식에게 폭행 당한 노인이 많아졌다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어느 노인의 말씀은 정말 기막히다. “맞는 것은 그래도 나아요. 음식을 축낸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어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다. 정말 개만도 못한 세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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