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단락 지어진 앨라배마 법원의 십계명비 철거를 둘러싼 논란은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해 왔던 미국민이 어떻게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법 이성을 거부하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십계명비 철거반대의 법조계 주자 로이 무어 주대법원장은 “법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에 복종해야 하며, 이것은 기념비에 대한 문제도, 종교의 문제도 아니라 전능하신 신을 인식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녕 그의 대법관 자격이 성경에 근거한 하느님의 임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대법관의 자격으로 발언할 때는 종교인이 아닌 대법관으로서 먼저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로이 무어는 “낙태와, 사도미(sodomy),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죽어 가는 것 등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공격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각종 사회문제들과 범죄가 기독교인들의 문제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를 기독교인들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십계명비 철거가 바로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자가당착적 인식에 다름 아니다. 십계명비 철거에 대한 결정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내려진 결정이 아니라, 법원에 나란히 서게 될 비종교인, 타종교인을 포함한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다. 사태가 이러할 때 과연 로이 무어가 우려하는 것은, 십계명비 철폐로 인한 사회혼란과 범죄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기존의 권위 실추에서 오는 불안감은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자명한 문제가 다시 새롭게 인식된 것은 바로 지난 28일 한국일보 칼럼 ‘법 우습게 아는 법관’에 대한 재미한인기독선교재단의 반박 글 때문이다. 이 반박 글을 다시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한인 기독교 사회 역시 십계명비 철거와 관련 잘못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이 반박문 ‘십계명비 설치 옳은 일’ 이란 글은 칼럼 논지에 대한 중요한 오해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첫째, ‘십계명비’는 미국의 건국이념은 기독교이고 그런 나라의 대법원장이 십계명을 돌판에 적어 법원 앞에 세운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숭고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칼럼 ‘법 우습게…’가 무어를 비판한 것은 그가 십계명비를 세워서가 아니라, 대법원의 철거 결정을 법관의 자격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 이다. 한국의 대법관이 행여나 유교비를 법원 앞에 세우고 법원의 철거 결정에 거부 시위를 할 경우,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교비를 세운 대법관이 아니라, 유교비 철거 명령을 거부한 대법관의 법에 대한 불이행인 것이다.
둘째, ‘십계명비’는 “미국의 대통령이 취임을 선서할 때 자신의 직무에 관한 약속을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하며 이는 미국사회가 기독교 사회임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취임식이 지니는 미국사회 예식관행이며, 사회적 관행과 법의 문제를 명백히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비에 관한 문제는 헌법에 기반한 논의인데, 이것을 사회적 관습과 관행에 관한 차원으로 끌어내려야 한단 말인가.
미국이 기독교적 사상에 전반적으로 기반하고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적 사회정치 체제에도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과 법관이 선거와 헌법에 의해서 당선된 이상 지녀야 할 임무는 바로 기독교인만이 아닌 타종교인, 비종교인들의 다양한 신념과 이해의 대변이기도 하다. 어쨌든 요즘 신에 복종을 행동강령으로 맹렬 시위를 벌이고 있는 기독교인을 보고 있으면, 하느님의 교훈인 희생과 사랑을 거슬렀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왜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적극 반대에 나서지 않았는지, 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독교 시위대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문선영/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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