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고 달력을 바꿔 달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다 해도 우리의 일상이 갑자기 달라지거나 세상이 바뀌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 해의 시작이라는 것이 사물에 대해서 새로운 눈빛을 갖게 하고 그 아침에 뜨는 해는 만물을 새롭게 하기에 그 날 위에 계획을 세우고 희망하는 것을 가꾸어 가려고 노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세웠던 계획일수록 작심삼일을 면치 못한다. 아주 작은 일, 쉬울 것 같으나 잘 지켜지지 않는 일, 생각이 머물기만 하면 지킬 수 있는 일을 우선적으로 계획하여 깊은 내면으로부터 조그마한 변화라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철학자 아미엘은 “나날의 새벽은 삶과의 새 계약에 서명한다”고 했다. 정초가 지나고 며칠 후,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연 전에 오랜 직장생활을 끝내고 책과 여행을 벗하며 지내는 친구다.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전언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워낙 기발한 아이디어로 늘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분이라 뭔가가 있을 것 같은 호기가 동하여 서둘러 채비를 했다.
친구는 나를 여느 때보다 더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바의 ‘해피 뉴 이어’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신년하례식이라 하여 몇 명이 모이는 줄 알았는데 찻잔이 두개가 놓여 있었다. “더 올 사람은 없어?” “글세” 친구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차를 따르는 친구는 매사 자신만만하던 기백이 전혀 없이 기운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어떤 동요가 인 듯싶다. 자신을 추스르기 힘든지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근래에 가슴이 시려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자 주 했지만 단순한 겨울 앓이로만 생각했다. 그저 흐르는 세월의 무상이 친구를 나약하게 만드는 줄 알았다. 결혼 적령기가 되지 않아 혼기가 늦어지 는 것 같다는 말로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으나 외로움의 실체는 깊었었던 것 같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친구의 시선은 창 밖을 의식하곤 했다. 마치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좀 있으려니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인기척이 났다. 친구가 문을 열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글쎄”의 주인공이 아닐까? 먼발치로 봐 도 캐주얼 차림이 잘 어울리는 젊은이였다.
밝은 미소로 청년을 맞는 친구를 보며 머리가 띵했다. 그러나 그는 꽃집에서 배달 온 청년이었다.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를 가끔씩 보여주었기에 “글쎄”를 결혼이라는 폭탄선언으로, 청년을 결혼 대상자로 알았던 나의 순간적 착각이었다. 거실 중앙에 놓인 꽃으로 집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작설차가 주는 깊은 맛과 향기가 꽃과 어우러져 색다른 차의 향을 선사해 준다.
누군가 그리울 때, 외로울 때 우리는 편지를 쓰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인다. 나의 마음을 전하고 상대방을 내 마음에 초대하는 것이다.
친구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새해를 자축하고 싶어 스스로에게 꽃을 보내고 함께 축하해 줄 사람과 새로운 다짐을 보여주기 위한 인증자가 필요했던 것, 어쩌면 그것은 외로움을 떨구어내기 위한 안간힘일 것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새해 희망을 밝히고 다짐한다.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에의 지향이며 못 이룬 소망의 잔재일 것이다. 사람을 가리켜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말함도 우리가 꿈을 지니고 살기에 일컫는 말이다.
지난날에 뜻을 세웠으나 지키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하더라도 또 한번 계약해 볼 일이다. 나날이 새롭게 다가올 새날을 위해서.

유 숙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