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덕 <주부>
초등학교 4학년 때 글짓기 대회에서 특상을 탄 내게 선생님은 전국 대회를 준비 시킨다고 수업이 끝난 후 매일 시를 한편 씩 쓰게 했었다.얼마 동안은 우쭐한 마음에 열심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신이 났지만 불과 몇일 만에 부담이 되면서 우르르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머리 속에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데 선생님을 실망 시키기는 싫고 누군가가 대신 써 주었으면 하는 환상 끝에 어디에선가 감쪽 같이 베껴 올 현실적인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공부하랴 연습하랴 매일같이 해야 하는 일에 얽매여 살던 나는 공부할 필요도 없고 일하다 낮잠도 자고 아무때나 놀고 있는 집안 일 해주는 언니를 부러워했고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어 멋있어 보이는 언니는 청소를 끝낸 마루에 앉아 곧잘 무언가를 읊조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가 선명하게 들려왔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시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라면서 자기가 지은 시 라고 자랑스럽게 알려주었다. 언니의 시!
그 순간 머리가 시원하게 뚫리며 이런 언니가 내 곁에 있는 한 다시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이 사실을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약속하며 손가락을 걸었다. 어느 누구도 상상 못할 이런 일을 해 낸 나의 영특함에 감탄하며 세상을 다 얻은듯한 기쁨으로 갖은 애교를 떨며 받아 적은 가사를 진짜 내 것처럼 조금 고치기 까지 했다. 사실 노래만 제대로 했다면 그걸 시로 듣지는 않았을 텐데 음정을 못 내고 흥얼거린 것이 표절할 것만 애타게 찾던 나에게 시로 들린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어른스러운 시를 쓰다니 하며 놀라서 좋아하실 선생님의 칭찬과 또 다시 교단에 올라 상 받을 생각에 유난히 긴 그날 밤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들뜬 마음에 아침을 맞고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려 선생님 앞에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이미 머리 속에 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 해서 완성 시킨 시가 타향살이 였다. 시를 읽고 기뻐하실 선생님의 표정은 어디 가고 탁 가라 앉은 목소리로 지금 쓴 거냐고 물으시는데 덜컹 내려 앉은 가슴과 달리 간신히 신음 소리처럼 나온 대답은 녜 였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 무지한 표절 사건으로 선생님과 시 쓰기 연습은 끝났지만 만일 그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쯤 작가로 이름을 떨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면 어릴 때부터 몸소 터득한 못된 버릇으로 끊임없이 표절 시비에 걸려서 법정에 드나들며 어물전 망신을 시키고 있을 염치없는 꼴뚜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중년에 하는 타향살이도 해가 넘어가고 노을이 고울 때는 마음이 싸 해오며 대책 없이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은데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한번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때로 힘들게 까지 했던 철없는 시절의 표절사건은 언니의 타향살이가 나의 곡이 되라는 운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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