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구 목사(호놀룰루한인장로교회)
심리적 환원주의의 믿음 이해가 인간의 내면으로 믿음의 장을 제한시킨다면 사회적 환원주의의 믿음 이해는 사회 참여의 행동 속에 믿음을 제한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심리적 환원주의가 믿음을 정신 기능이나 심리작용 정도로 본다면, 사회적 환원주의는 불의한 사회의 구조 개혁을 도모하려는 행동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러한 불의하고 죄악된 사회 구조를 하나님이 심판하고 징계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히브리 백성을 억압하였던 애굽의 바로와, 죄악과 교만과 폭력의 도성이었던 앗수르와 바벨론을 심판하고 죄악의 대가를 받게 하였던 것이 그 좋은 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고 억압받는 인간들을 악으로부터 구출해 냈다.
사회적 환원주의의 믿음이 바로 이러한 점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과 환난의 원인을 사회악에 우선적으로 두며, 사회악을 깨
트리지 않고는 진정한 인간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환원주의적 믿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의 장을 단지 사회 참여의 행동과 사회 정의 등의 실현에 그 영역을 제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성적 환원주의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권위 앞에 굴복하는 영적인 차원, 그리고 이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는 윤리적 실천적 차원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종교적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기복적 신앙이 되어 버리기 쉽고, 영적 차원을 강조하면 신비적이 되어 버리며, 윤리적 차원을 너무 강조하면 율법주의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령, 종교적 차원의 믿음은 기도와 찬양 등의 열심 여부에 따라 신앙의 정도를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유리되는 것이고, 종교적인 행위 속에 하나님의 역사의 장을 제한시키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 믿음의 이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단순히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개인의 죄 용서와 중생의 차원에만 연관시키는 것도 역시 환원주의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능력을 단순히
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서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가 지극히 한정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환원주의적 믿음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인간 삶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심리적인 모든 시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서 믿음에 상호 강화작용을 유발시키는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 삶의 모든 상황에 총체적으로 역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생명을 넘치게 받으려는 커다란 믿음이해의 바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한국 교회 신학이 안고 있는 근본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신학(Alternative Theology)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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