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마의 휴일(1953)은 단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 그레고리 펙이 궁전을 나서는 뒷모습이 주는 고독함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로마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개인의 자유, 존재의 의미, 윤리적 선택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떠 앉게 된다. 스페인 계단과 트레비 분수, 골목의 디테일은 시간과 사람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시는 그렇게, 살아 있는 기억의 공간이 된다.
서울과 로스앤젤레스(LA) 역시 기억이 깃든 거리, 삶이 스며든 골목을 간직해왔다. 서울의 인사동과 북촌, LA의 리틀 도쿄와 벙커힐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일상과 공동체의 시간이 흐르던 장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 거리들을 걷다 보면 낯선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거리는 여전히 그들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 연출인가?”
서울 인사동에는 평생 붓을 만들어온 장인이 있었다. 작은 필방 창 너머로 사람들은 그의 손끝을 지켜보며 안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엔 브랜드 옷을 파는 명품 의류 매장이 들어섰다. 친구를 만나던 거리는 ‘쌈지길’, ‘마루’, ‘인싸골’ 이라는 도심재개발로 들어선 대형 문화관광 상품 매장으로 대체되었다. 삶의 깊이는 사진을 찍고 10분만에 떠나는 관광의 가벼움으로 치환되었다.
LA 리틀 도쿄의 오래된 수제 도시락 가게는 유기농 건강 스무디를 파는 카페로 바뀌었다. 전통은 유지되는 듯하지만, 살아 있는 문화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세팅으로 변했다. 방문객 센타에서 만난 직원은 “리틀도쿄도 개발 압력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 거리의 원래 모습을 지키게 어렵다”.고 말한다. 북촌도 다르지 않다. 오래된 한옥과 그 사이로 이어지던 골목길은 점차 그 빛을 바래고 있었다. 수제비에 동동주를 곁들여 파는 50여년된 식당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리모델링으로 공간은 살아났지만, 기억은 밀려나고 있었다.
벙커힐은 루이스 멈포드가 경고한 “비도시적 도시화”의 전형이다. 과거 서민들이 모여 살던 주거지는 철거되었고, 그 위엔 고층 오피스 빌딩과 회색 콘크리트 광장이 들어섰다. 효율성과 수익성 아래 도시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졌다. 거리와 골목은 사람의 삶이 얽힌 공간이지만, 이윤을 앞세운 재개발은 그곳을 ‘컨셉화된 무대’로 만들었다.
반면에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에서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곳에서는 과거의 도시와 마주하고, 도시가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도시의 진정한 매력은 오래된 건축물 자체보다, 그 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에서 나온다. 아침이면 성당 앞 돌길을 쓸던 노인, 아이가 낙서하던 벽면, 밤이 되면 아치 그림자 아래에서 조용히 입을 맞추던 연인. 그런 장면들 이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든다. 관광의 화려함이 아니라, 시간이 깃든 도시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도시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건물인가, 삶의 궤적인가?” “고딕 지구”의 돌담과 광장은 이 질문에 조용히 응답하듯 서 있다. 나는 오래되었지만 끝나지 않았노라고. 나는 여전히 삶의 흔적을 품고 살아 있다고.
서울의 인사동과 북촌, LA의 벙커 힐과 리틀 도쿄 등도 “고딕 지구”와 닮았다. 모두가 기억의 골목을 갖고 있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도시의 미래가 달라진다. 보존은 단지 건축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장소에 깃든 시간과 사람의 서사를 함께 지키는 일이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도시가 기억을 품는 방식, 도시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며 걸을 수 있다.
기억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궤적이며, 그 궤적이 도시를 도시답게 만든다. 벙커힐의 실패는 LA의 ‘코리아타운’이 가야 할 길을 암시하고, 인사동의 변모는 서울의 도시계획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 된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도시를 소비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 살아 있는 회상의 공간으로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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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성 도시계획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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