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구 목사(호놀룰루한인장로교회)
목회자의 질투심은 인사 문제에 있어서 더 많이 나타난다. 제법 큰 교회에 자리가 나서 자기 아닌 아무개가 후보로 거론된다고 할 때, 특히 자신이 잘 아는 같은 연배이거나 선배일 때 깎아 내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까마득한 후배일 경우 체면 때문에 함부로 헐뜯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 선배이거나 엇비슷한 동년배일 때는 은근한
시기심을 품고 흠집을 내려고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웃 교회나 같은 지역 또는 교단 내의 한 교회가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을 때 이 또한 질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그런 과도한 질투심은 상대방을 헤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옥죄기 때문에 반드시 넘어서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질투심을 건설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설교 잘하는 은사를 주신 것은 아니며, 다 교회를 급성장 시키는 은사를 주신 것도 아니며, 다 대형교회를 이끌 수 있는 리더쉽을 주신 것도 아니다.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겸손히 순복할 때 질투심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오늘의 삶 저 너머 죽음과 허무와 영원을 볼 수 있는 영성을 기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진상을 확연히 깨쳐 영적 진보를 이룬다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일체의 물상이 점점 작아지듯이, 영원의 빛에서 오늘을 본다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느냐의 싸움은 부질없
는 짓일 게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사는 우리 목회자들은 알베르 까뮈가 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까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에 대하야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한 번쯤은 꼭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도 질투로 인해 즐겁지 못하게 끝난 이야기들이 많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그랬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질투는 결국 대단히 어두운 그림자만을 남기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만일, 프로이트의 말대로 ‘질투’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잘 다스리거나,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김흥규 목사는 그 대안적 방법으로 ‘은사활동과 영적인 성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누구든지 무력감보다는 자기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당당히 자기 ‘나름’의 목표와 삶을 최대한 키우고 꾸려 나가자는 것이다.
질투 속에는 누구든지 자존심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이기고 비교하는데 그 자존심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것’의 소중함을 더욱 정확히 알고, ‘나름’의 목표와 삶을 더욱 값있고 보람되게 열심히 키우며 꾸려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과연 누구이며,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아는 정체성의 확립이 먼저 필요할 게다. 그래서 훌륭한 우리 삶의 지혜는 진정 ‘질투’보다는 ‘자신감’과 ‘성실함’의소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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