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어머니께서 며칠 다녀가셨다. 혼자 거동하시고 식사도 잘하시는지라 늘 감사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짬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무언가 열심히 듣고 계셨다. 알고 보니 유튜브에서 나오는 여성들의 사연이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고, 배신과 이혼을 딛고, 자식에게 상처받고도 삶의 자리를 되찾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물론 유사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생성해내는 유튜브 알고리즘의 유혹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주인공과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셨다.
여자들은 혼자 등산을 가도 정상에 오르면 금세 서너 명이 모여 도시락을 나눠 먹고 남자들은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혼자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능력이 여성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다. 같은 세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서사는 감정의 지층을 건드리며 어느새 연대 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어머니의 저녁 풍경은 인간이 이야기로 서로를 붙들어온 오랜 방식의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 문명을 가능하게 한 핵심으로 ‘서사’를 지목한다. 인간은 실재하지 않는 질서와 상징을 함께 믿고 그 믿음 위에 공동체를 세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공감 능력이 전제돼야 한다. 비슷한 배경, 유사한 경험, 감정의 결이 닿아야 힘을 얻는다. 인간은 이야기로 세상을 이해한다.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가 평탄하다면 우리는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팥쥐 엄마의 구박이 있기에 콩쥐의 삶은 더욱 선명해지고 흥부를 괴롭히는 놀부의 심술이 있기에 우리는 그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된다. 시련과 갈등·굴곡이 서사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며 이야기의 힘은 결국 함께 느낄 때 완성된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고 했다. 세상은 우리 기대처럼 삶의 의미를 보장해주지도 않고 노력이 반드시 보상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절망도, 체념도 하지 않았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산을 오른다. 그 반복의 자각 속에서 인간은 존엄을 얻는다. 유튜브 사연 속 여성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밥을 짓는, 다시 하루를 선택하는 그 반복된 의지 때문이다.
인공지능(AI)도 소설을 쓰고, 영상을 제작하고, 가상의 인물을 탄생시킨다. 완벽한 얼굴과 매끄러운 서사를 가진 존재가 몇 초 만에 생성된다. 하지만 한 인간이 겪어낸 시간 속에 실패의 흔적과 선택의 책임이 축적될 때 서사는 비로소 무게를 얻는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위대한 작품은 그 형식이 어떤 시대와 어떤 고통을 통과했는지와 연결될 때 비로소 이야기의 힘을 가지게 된다. 전쟁을 지나온 이중섭의 그림과 윤동주의 시 구절에 사람의 체온이 배어 있듯이.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서사는 ‘가능한 감동의 조합’일 뿐이다. 상처의 대가를 치른 기억,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책임까지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경쟁력을 묻는다면 나는 속도나 효율만을 말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느리고 불완전하며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감당해온 시간이 더 큰 설득력이 있을지 모른다. 완벽한 이미지보다 상처 있는 얼굴이 오래 기억되는 것도 그 얼굴이 지나온 시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끝내 무너지지 않은 시간만이 인간의 얼굴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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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보 경기도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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