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을 기치로 13개 주 대표가 1774년 창설한 독립회의는 추첨으로 뽑는 징병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징집대상자들은 독립투쟁에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독립 뒤 징병제는 자연스레 소멸됐다.
세월이 흘러 남북전쟁이 터졌다. 노예제도를 지키려는 남군 측은 1862년 징병제를 시행했고 북군 측은 이듬해 의무병역법을 제정해 부족한 병력을 메웠다. 노예에게 해방을 안겨주려는 북군과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남군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지만 징집된 병사들은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슴에 품은 채 전장에서 쓰러졌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은 젊은이들을 징집했다. 지축을 흔든 세계 대전에서 미군들이 많이 사망했지만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는 자긍심으로 가득했고 이들의 고귀한 죽음은 지금껏 후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파병할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징병제 카드를 활용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었지만 실제 당시 월남 정부는 극도로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베트남 전쟁이 미국과 세계의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었다.
젊은이 상당수가 참전에 반대했고 일부 고위층 자제들은 목숨이 경각에 처하지 않는 안전한 보직으로 빠졌다. 과거의 징집과 달리 목숨을 걸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반전운동의 호소력은 여기서 나왔다.
하기야 영국은 1957년 프랑스는 2001년 징병제를 폐지했고 러시아와 대만이 이러한 흐름에 동조할 채비를 하고 있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징병을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베트남 종전 이후 줄곧 이어져 온 미국의 모병제를 징병제로 대체하려는 법안이 연방하원에서 402 대 2로 부결됐다. 2년 전 상정됐다가 표결에 부쳐지지 않은 채 잠자고 있던 법안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연방하원이 서둘러 표결에 회부해 부결시킨 것이다. 부시가 재선되면 이라크 파병 문제 등으로 징병제를 살려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라크 공격이 미국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면 징집법안 죽이기에 그토록 민첩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을까. 진정 이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다면 징병제를 되살린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텐데 말이다. 법안 부결로 징병제 소문은 잠잠해지겠지만 떫은 뒷맛은 도통 가시지 않는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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