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중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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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호반, 서호(西湖)로 유명한 항주(杭州) 땅. 옛 남송(南宋)의 도읍이다. 아침결에 제법 삽상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호숫가로 나선다. 그늘 넉넉한 버드나무 숲 아래, 둥근 부채만큼 큰 연잎들이 여러 겹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를 수놓고 있다. 낮게 드리운 물안개사이로 돛배들이 시름없이 떠가고..... 이국의 물가에 서서 고향 내음에 취한다.
이 항주 땅에 송나라 제일의 충신 악비(岳飛, 유에훼이)의 사당이 있었다. 이런 명승에 걸 맞는 인물의 전설이 살아있음이 반갑다. 빼어난 자연과 함께 숭고한 사람의 얼이 함께 추앙되는 모습이 아름답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이 30에 유망한 장군이 되어 송조(宋朝)부흥에 신명을 바쳤다. 그러나 간신들의 시기로 39세 때 살해되고 만 비극의 무장이었다.
중원(中原)복귀의 꿈이 거의 이루어질 즈음에 당한 그의 죽음이라 더 억울하고 애처롭다. 당시 당나라를 계승했던 송나라는 북쪽 오랑캐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늘 시달렸다. 결국 북송은 망하고 남은 무리들이 항주(抗州)땅으로 쫓겨와 남송을 세웠다. 그러나 번성하는 금의 세력은 남송도 계속 위협했다.
이 난세에 장수 악비가 있었다. 그는 잘 훈련된 군사로 금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그들의 사령부가 있는 개봉까지 위협했다. 태산은 움직여도 악비의 군사는 움직이기 어렵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간신들은 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악비에게 모반죄를 씌웠다.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문신을 등에 새기며 나라에 충성했던 악비는 내 결백은 하늘의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라고 포효하며 죽어갔다.
악비의 원통한 죽음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진상이 밝혀졌다. 민심은 간신배들을 잊지 않고 징벌했다. 장군을 죽인 진희와 만사설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려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악비는 구국의 영웅으로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수많은 참배자들이 이들 철상에 침을 뱉거나 매로 치며 지나간다. 천추에 이름을 더럽힌 간신들의 말로를 보며 어느 나라의 역사이든 권선징악의 공의(公義)가 기필코 이루어져야한다고 느낀다. 순박하지만 준엄한 민초들의 원한은 참 뿌리가 깊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아직도 밀가루 반죽을 순대모양으로 길게 만들어 뜨거운 기름에 튀겨 먹으면서 간신 진희를 씹듯 한다는 것이다. 이게 유명한 음식, 유조(油條, 여우티아오)라 하였다.
악비를 보며 우리의 남이(南怡)장군을 떠올린다. 남이 장군도 세조 때 무과에 장원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무장이었다. 그 공으로 28세에 이미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그도 유자광(柳子光) 일당의 모함으로 억울한 반역죄를 쓰고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 역신 유자광에게는 중국 간신 진희에게 내린 후세의 벌이 없다. 남이 장군만 역사의 패배자로 억울하게 죽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혼은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지도 모른다. 일제치하 때 애국선열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반민족분자들을 응징하지 못했던 우리의 고질적인 공정심(公正心)의 결여거나 건망증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 민초들에게도 원한 맺힌 음식 징계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에게 원한을 품게 된 개성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삶아서 김치에 싸먹으면서 성계육(成桂肉)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의 사약보다도 더 준엄했던 민초들의 심판이 우리 문화에선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중국 땅에 송나라도, 금도, 몽고의 원나라도 이젠 다 스러졌다. 숱한 제왕들과 세도가들의 이름도, 명예도 사라졌다. 그러나 충신 악비의 정충보국의 얼은 그의 포효처럼 오늘도 태양아래 빛나고 있다. 그는 민초들의 사랑을 뜨겁게 받고 있었다. 문득 고향 땅에 외롭게 떠있을 우리의 남이섬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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