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씨의 부음을 들었다. 74세를 일기로 객지 일본에서 별세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왕조 마지막 왕, 순종의 세자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탐 하면서 어린 왕세자를 일본이 볼모로 잡아갔다. 그 후 그는 일본 황족의 딸과 정략 결혼을 했다.
이구씨는 그들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의 무서운 국가적 약탈 침략 행위의 희생양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숙명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학습원에서 공부하며 일본 황족 어린이들 사이에 기여 얼마나 외톨이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그의 어머니 방자 여사는 동경 유학 한국 여학생들을 매년 초청해서 파티를 차렸고 무궁화 무늬로 찍은 과자를 선물로 나눠주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되면서 이구씨는 부모와 같이 일본 황족에서 쫓겨났다. 한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국적 유랑민이 됐다. 이구, 그는 살아 남기 위해 미국 유학의 꿈을 가졌다. 그러나 국적이 없어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절망의 절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일본 주재 미국 군인 어느 영관급 장교의 도움으로 무국적인으로 여권을 얻어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수재였다. 미국 명문 공과대학 MIT에 입학 졸업했다. 독일계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파란 많은 삶이 이어졌다. 행복하지 못했다. 그 후 일본에서 객지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 한 많은 생을 마치었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혼 한 부인은 이 구씨의 부음과 같이 신문을 통해 그의 사진이 나타났다.
왜 우리 민족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불행하게 태어난 그를 그렇게 박대했을까. 그래도 500여 년이나 이어져온 이씨 왕가의 마지막 왕손이 아니었나. 그의 명복을 빈다. 그의 불행은 한민족의 공동의 불행이다.
김충국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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