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 이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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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무덤덤해지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해가 다가오는 계절의 길목에서 때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을 벗삼아 조금은 우울한 기분으로 지난날을 돌아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근원 모를 설레 임으로 새로 오는 시간을 기다리곤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 모르게 가고 오는 것에 대한 회한이나 설레 임이 줄어든 것 같다. 무감각해진 것일까? 아니면 초연해진 것일까?
첫째, 무감각! 한편,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내게도 삶은 언제나 만만치 않은 도전으로 다가온다. 이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감각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인생이 힘겹고 고달픈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오늘’이라는 시간에 매몰되어 거기서 한숨짓고 힘겨워하며 씨름할 뿐이다. 오늘 힘겨운 사람에게는 회고와 전망이 그저 사치일 뿐이다. 다른 한편, 인생의 수풀을 헤쳐가면서, 후회해본들 소용없다는 사실과 꼭 기대한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터득했기에 무감각이 내 몸과 맘을 감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무덤덤함’이 무감각해진 탓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희망을 버리는 곳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무감각이 꼭 세월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세월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망도 없고 이웃도 없는 삶―누가 이런 인생을 원하겠는가!
둘째, 초연함! 초연해지는 것은 무감각해지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무감각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이다. 세월도, 물건도, 사람도…느끼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초연해지는 것은 보다 객관적이 되는 것이요, 더 큰 여유를 가지고 더 적나라하게 느끼고, 그래서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초연함은 쉽사리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사람과 사물에 지나친 욕심을 품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칼릴 지브란의 표현대로, “있는 그대로의 당신”(혹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다. 무감각이 고개를 돌리는 것(외면하는 것)이라면, 초연함이란 보되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며, 상대방도 보고 자기 자신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면 쉽사리 감정에 휩쓸려 후회하고 포기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해가 스치듯 지나간다. 세월이 스스로 가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세월이 스스로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불러 맞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무덤덤하되(disinterested) 무감각하지(uninterested) 않는, 세월도 사람도 초연하게 보내주고 맞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더 깊이, 더 맑게 사랑하며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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