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란<수필가>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고상한 이미지에 금이 가는 게 조금은 꺼려지나, 화투판에서 잔뼈가 굵었던 나의 과거에 대해서 말해 보련다.
우리가족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님은 혼자서 책을 보다가 심심하면 큰손녀인 나를 불러 앉혀놓고 화투를 치자 하셨고, 효도차원에서 치는 민화투도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 고스톱을 가르쳐 준 남동생 때문에 긴 겨울 방학때면 우리 삼형제는 라면을 끓여 먹으며 고스톱을 쳤었고, 대학시절에는 하숙을 했었는데, 하숙집 남학생들은 한가한 일요일날 오후, 늘 고스톱 판을 벌였었다. 그리고, 졸업 후, 나는 결혼할때까지 잠원동에서 한 할머니와 5년 동안 동거를 했었다. 그 할머니는 젊은 시절 지방에서 소문난 부자였지만, 일찍이 남편을 잃고 평생 혼자 살아 심심했기에 고스톱 판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많은 재산을 거기서 날렸다고 했다.
이혼도 안되던 그 옛날에, 부모가 정해준 남편과 너무 맞지 않아 억지로 살다가, 육이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들한테 남편이 북으로 끌려 가는 바람에 운 좋게도 결혼생활에서 해방되었다며, 남편이 행여 살아서 집으로 다시 돌아 올까봐 서둘러 재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뜬, 그 시대에는 참으로 보기 드문 엽기적인 할머니였다.
자식들은 미국에 살고, 적적한 할머니는 체력 좋게도 매일 밤마다 동네 아지트 장소로 나가서 고스톱을 치고 새벽에 들어오셨다. 같이 사는 긴긴 세월동안, 어제는 쓰리고에 흔들고 피박을 써서 하룻밤에 40만원을 잃었다는 등, 고스톱 판에서 그날 그 날 할머니가 어떻게 돈을 잃었는지 나는 정말 지겹게 들어야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사람은 돈내기 고스톱을 한번 쳐보면 그 인간의 진면모를 알 수 있으니, 나중에 결혼할 사람하고 결혼 전에 돈 걸고 고스톱 한판 꼭 쳐보라는 진심 어린 충고도 아끼지 않으며, 나와의 작별을 무척 아쉬워 하셨다.
그 지긋 지긋한 고스톱 얘기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영어 개인 교습 중에 미국인 교사가 화투를 꺼내며,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 포커라면서 기념 선물로 줬는데, 그 게임이 너무 재미있게 보이니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고스톱을 쳐대는 한국인들의 끈질긴 정신에 놀라워하며, 나는 고스톱을 가르쳐주고, 대신 2 년동안 공짜로 영어 레슨을 받아 그 당시 유학생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아이들이 생긴 이후 결국 고스톱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지만, 가끔은 남동생들과 벌였던 고스톱 한판...그때의 그 재미가 너무나 그립다.
그리고, 예전부터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었다. 나는 어떠한 불로소득도 얻지 못하는, 이를테면 복권이나, 카지노, 하다못해 가게에서 추첨해 경품으로 주는 쌀 한 자루도 타본 적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지만, 내게 주어진 패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때로는 잔머리를 굴려 가면서 열심히 살아가면 인생은 파토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게 껍데기만 많이 떨어지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피박 씌워서 이길 수도 있고, 또 광이 들어 오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욕심 부리지 않고 광만 팔아도 그리 큰 손해는 아니라는 것을...인생에서 어느 때가 가야할 때인지도, 또 어느 때가 멈춰서야 할 때인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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