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우스는 한니발과 맞서 싸운 로마의 장군이다. 기원전 217년 그가 장군직을 맡았을 당시 로마는 트라시메네 전투에서 대패해 망하기 직전이었다. 이 날 하루 전투로 로마군 3만명 중 1만 5,000명의 죽거나 다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됐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한니발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 슬슬 피해 다니다가 뒤통수를 치는 전법을 썼다. 한 때는 ‘겁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이 소모전략은 주효해 한니발을 승기를 잃고 결국 패퇴하고 만다.
이 옛날 장군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파비안협회다. 마르크스가 죽은 해인 1883년 사회주의자들의 토론 클럽으로 발족한 이 단체는 버나드 쇼와 H.G. 웰스를 비롯, 기라성 같은 지성인들을 회원으로 갖고 있었다. 파비안협회라는 이름은 로마의 장군을 본받아 자본주의와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는 취지에서 붙여졌다. 어쨌든 이 작전은 들어맞아 1945년 이 협회의 회원인 클레멘트 애틀리가 처칠을 누르고 총리가 되는 개가를 올린다. 그는 집권 후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무덤에서 요람까지’의 복지사회 건설을 추진했다. 70년대 말 대처 등장 직전까지 영국을 파탄의 위기로 몰아간 ‘영국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세력을 떨쳤던 이 단체의 영향력은 영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의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많은 지식인들도 그 이념에 공감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간디와 네루였다.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를 배격하고 자국 산업보호를 이유로 무역장벽을 치고 기업 설립과 운영에 까다롭게 관여했다. 그 결과는 그칠 줄 모르는 가난이었다.
인도가 이 두 사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 발을 디디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된 90년대 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인도는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인도는 지난해 GDP가 연 6%가 넘는 고성장을 이룩했으며 인도의 다우존스인 뭄바이 센섹스 지수는 2년반 사이 3배가 넘는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의 MIT’로 불리는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는 인도의 정보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인도의 철강 재벌 락시미 미탈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사람이다. 포브스가 매년 작성하고 있는 세계 최고 부자 리스트에는 12명의 인도인이 올라가 있는 반면 중국인은 2명뿐이다. 세계 30개국 기업인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인도 기업인의 자신감이 세계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로서는 도로나 공항, 호텔 등 부대시설 면에서 경쟁자인 중국과 비교가 안 되지만 인도가 가진 장점도 많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사법부의 독립 등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소프트웨어 측면에는 중국이 따라가지 못한다. 이런 제도적인 뒷받침 때문에 인도에서는 소위 ‘관시’라는 줄 대기가 덜하다. 따라서 부패가 적으며 재산권 보호도 중국보다 뛰어나다. 중국 은행들은 비즈니스 전망보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융자 여부를 결정, 수천억달러의 구조적인 부실대출에 시달리는 반면 인도 은행은 아시아에서 가장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자유 무역협정보다 더 광범위한 포괄적 경제 파트너 협정을 인도와 추진 중이라 한다. 중국과 인도의 약진은 21세기 가장 큰 사건의 하나가 될 것이란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동안 중국의 성장에 가려 인도의 발전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의 처참한 가난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이 만든 것이다. 국내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도인들이 해외에만 나오면 하이텍, 의료, 금융 등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후발주자인 거북이 인도가 토끼 중국을 따라 잡을 수 있을 지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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