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택시,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한국에서 연예프로 진행자로 인기 있는 한 재담가가 재치 있는 비교를 했다.
“사랑은 택시와 같은 거죠. 함께 걸어온 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랑하다 헤어질 때 겪는 아픔, 그 감정의 대가를 그는 택시 요금에 비교했다. 서른 갓 넘은 청년인 그가 ‘사랑’이라고 했을 때는 필경 젊은 연인들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별로 인한 슬픔은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서로 사랑했는지, 그 기간과 비례한다는 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열정으로 시작되고, 열정이 식으면 끝나도 무방한 젊은 날의 사랑의 관계는 얼마나 간단 명료한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며,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우리의 삶은 택시 타고 내리듯 간단하게 끝낼 수 없는 관계들로 채워진다. 열정이 식어도 지속되고, 사랑이 없다해도 지워지지 않는 관계들, 그러면서도 행복과 불행을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우리 인생의 중추적 관계들이다.
며칠 전 컴퓨터 키보드를 잘못 눌렀더니 스크린에 달력이 뜨면서 한국에서 지키는 5월의 기념일들이 죽 나열되었다. 1일은 근로자의 날이자 법의 날, 5일은 어린이날(올해는 석가탄신일), 8일은 어버이날(재향군인의 날), 15일은 스승의 날, 19일은 성년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그리고 31일은 바다의 날이다. 우리 삶의 대동맥과 같은 관계들을 기념하는 날들이 5월에 모두 담겨있다.
모든 관계를 특별한 인연으로 해석하는 불교에서는 같은 나라, 같은 동네에 태어나는 것만도 상당한 인연이라고 본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의 인연은 대단히 깊은 필연인데, 그 보다 더 깊은 인연이 부모 자식의 인연이고, 그 위가 형제 자매, 그 위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라고 한다. 몸을 나아준 부모 보다 진리에 눈뜨게 해주는 스승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다. ‘줄탁의 인연’으로 기려지는 관계이다.
‘줄탁’이란 선가(禪家)의 비유이다. ‘줄’은 알속의 병아리가 달이 차서 밖으로 나오려고 껍질을 쭉쭉 빠는 것, ‘탁’은 이에 맞춰 어미 닭이 밖에서 탁탁 쪼아 껍질을 깨트려주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탐구하는 제자, 그를 돕는 스승은 바로 이런 특별한 관계라는 데, 평생 가슴에 담고 존경할 스승 혹은 아끼는 제자를 가진 사람들은 요즘 많지가 않다. 이기적인 경쟁 사회가 스승과 제자라는 소중한 관계를 퇴화시키고 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짝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땅의 양분과 하늘의 햇빛, 물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농부가 매일 둘러보며 잡초 뽑아주고, 해충 없애주며 정성껏 보살펴 주어야 풍작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농사짓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한 후배와 만난 자리에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처럼 여기며 근 20년 발길을 끊어서 아버지가 끝내 아들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난 어느 가족의 이야기였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던 스크랩북을 보니 사정이 짐작되더라고 그 후배는 전했다.
스크랩북에는 아들의 사진과 함께 쪽지들이 있었다. 내용은 대충 “용돈이 필요해요”“내일 친구들과 캠핑가요”… 부모가 일하느라 바빠서 아들과 얼굴을 대할 시간이 없었고, 아이는 쪽지로 부모와 의사소통을 하며 성장기를 보냈던 모양이다.
비료, 햇빛, 물을 끌어다 대는 데 온 정력을 쏟느라 정작 농작물이 어떤지 살펴볼 여유가 없는 삶을 우리는 종종 살고 있다. 농부의 ‘발짝 소리’는 농부가 그 밭에서 보내는 시간을 의미한다. 관계는 시간이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관계를 살찌운다.
5월은 ‘관계의 달’이다. 남편·아내, 부모·자녀, 그리고 스승 등 내 인생의 소중한 관계들을 감사하며 살펴보는 달이다. 관계의 망에 구멍난 데는 없는지, 녹슨 데는 없는지 보살피며 이 달을 보내자.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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