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나 축구 이야기이다. 한달 여 전부터, 한국에서부터, 가을 산이 단풍에 물들 듯 붉은 색, 축구 이야기가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9일 월드컵 개막과 함께 화제는 온통 ‘축구’이다. 사무실에서도, 식당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몇 사람 모였다 하면 모두가 축구 전문가들이 된다. 한달 후에나 정해질 우승국 전망이며 어느 나라 어느 선수의 기량 분석이며 각자 수준껏 월드컵 정보들을 교환하면서 축구로 웃고 축구로 흥분한다.
축구 때문에 잠 못 자고, 축구 때문에 열 받고, 축구 때문에 목이 쉬는 ‘비정상적’인 계절이 왔다. 바야흐로 축제는 시작되었다.
월드컵이 우리에게 범 민족적 축제가 된 것은 불과 4년 전이다. 월드컵이 무엇인지, 어떤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뛰는 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축구 문외한들까지 한덩어리로 몰아 축구광이 되게 만든 일등 공신은 물론 ‘붉은 악마’이다. 2002년‘붉은 악마’들의 선동적 응원과 한국선수들의 선전이 어우러지면서 월드컵은 우리에게 민족적 축제가 되었다.
‘2002년 -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그해 여름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월드컵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생생한 그때의 열정과 신바람, 숨막히던 긴장과 감동 - 월드컵이 우리에게 ‘축제’였다는 증거이다.
삶은 우리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멈추게 하는 순간들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사실 아득하다.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 어떻게 그 숱한 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점과 점 사이를 선으로 연결하는 점선 그래프처럼 띄엄띄엄 떠오르는 어떤 특별한 날들로 삶은 이어지는 데, 그것은 바로 호흡이 멎도록 흥분되고 감동적인 사건이 있던 날들, 대개 잔치나 축제의 순간들이다. 월드컵이 그런 축제 중의 하나로 우리 삶에 끼여들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축제의 변질에 대한 우려가 솟고 있다.“축제도 좋지만 도가 지나치다”는 비판들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고 온 사람들은 저마다 말한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길에서 꼭지점 댄스를 추는 데 보기에 좋지가 않더라”“5.31선거 후 정치는 위태롭고 경제는 바닥인데도 관심은 월드컵뿐이더라”
한국사회가 고민하고 땀흘리며 해결해야 할 현실은 외면하고 즐기고 노는 축제에만 신경을 쏟는다는 걱정들이다.
한 젊은이가 행복의 비밀을 배우기 위해 현자를 찾았다고 한다. 현자는 행복에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두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을 구경하라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기름 두 방울이 담긴 찻숟가락을 건네주며 기름을 한방울도 흘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청년이 돌아오자 현자는 물었다. 아름다운 정원, 정교한 페르시아 양탄자, 서재의 훌륭한 책들을 보았느냐고. 기름 흘릴까봐 숟가락만 들여다봤던 청년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현자는 다시 청년에게 집 구경을 권했다. 이제 긴장이 풀린 청년은 집안과 정원의 구석구석, 주변 경치까지 즐기며 감상했다. 청년은 돌아와 자기가 본 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현자는 물었다. “찻숟가락의 기름은 어디로 갔소?”
구경에 정신이 팔려 이번에는 기름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행복의 비밀은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동시에 기름을 잊지 않는 데 있다는 현자의 가르침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존재로 살아간다. 일함으로써 현실적 삶의 조건을 챙기는 호모 라보란스,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놀고 즐김으로써 문화적 뿌리를 만들어내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다. 일만 하느라 즐기지 못하는 삶도, 즐김에 빠져서 할 일을 잊어버리는 삶도 행복에 이르지는 못한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음껏 즐기는 균형감각을 배운다면 삶은 내내 축제일 수가 있을 것이다. 축제의 계절, 월드컵 시즌에 연습해볼 일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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