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주부>
열네 살에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여자. 그럼에도 혼자서 요리하고 청소하는 여자. 들어본 적도 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여자. 학교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열심히 애쓰는 여자! 다큐멘타리 예고의 멘트를 보고 낚인 나는 잔뜩 감동할 준비를 하고 화면에서 ‘테레사 첸’을 만날 준비를 했다.
확실히 그녀의 삶은 남다른 데가 있었고 보통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을 경험했다. 어릴 적 경극배우를 꿈꾸던 소녀는 경극을 구경하던 극장에서 갑자기 귀에서 피와 고름을 쏟아냈다. 그 날 이후 소리를 잃었고, 오른쪽 눈에서 시작된 통증은 결국 그녀의 눈에서 빛마저 사라지게 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던 순간에 스승을 만나 배움의 길에 들어섰고 미국 퍼킨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와 제자 양성을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위인전에 나올 법한 그녀의 인생사다. 그러나 내 마음을 더 움직인 건 테레사가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넘어서 우뚝 서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남들이 감탄하는 인생 역정의 앞면이 아니라 아직도 고통 받고 있고 외롭게 사는 그래서 가끔은 까칠하게 변하는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남들처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테레사는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하게 되면 점자로 만들어진 특수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더듬거린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 맞춰서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다. 벨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녀가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아는 방법은 현관문을 두드리는 진동을 몸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한 시간 반씩이나 현관 앞에 앉아있게 만든 자원봉사자한테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는 걸 봤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분노를 삼키던 그녀를 보면서 ‘얼마나 숱하게 저런 분노를 삭혀가며 살아왔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누군가의 동정을 받거나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는 대단한 삶을 꾸려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나에게는, 기대했던 감동을 넘어선 애처로움이 있었다.
사랑했던 남자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 남자가 떠난 날이 되면 잠 못 들고 창문을 열어 놓는다는 여자. 단 사흘만 눈을 뜰 수 있다면 무얼 하겠냐는 질문(그녀는 헬렌켈러가 사용했다는 손바닥글씨로서 의사소통을 한다)에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과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과 정원에 가보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여자는 한없이 낮은 곳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삶에서 감동받길 원하지만 그 누군가는 감동의 순간만을 사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이어지는 삶의 질곡에 한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런 ‘테레사 첸’에게 섣불리 감동만을 기대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감동도 연민도 하지 말고 그저 담담하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눈높이를 맞추고 바라봐 주는 일, 그게 이웃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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