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식당에서 4일 오후 잔치가 열렸다. 전 직원이 모여 조그만 케이크를 자르고 소다수를 나누며 10분만에 끝낸 볼품 없는 파티였지만 분위기는 콜라 맛만큼이나 찡했다.
그 날이 어느 직원의 생일이었던 게 아니라 지령 6,000호의 한국일보 서북미판(10월 5일자)을 찍어내 막 발송을 끝낸 후 한 직원의 제의로 자축연을 가진 것이다.
일반 독자들에겐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만‘여섯번째 밀레니엄’호 제작에 직접 참여한 본보 스태프들은 마치 6천번째 작품을 낸 작가나 화가처럼 가슴이 뿌듯했다.
본보가 역사적인 6,000호를 발간하기까지 거의 30년이 소요됐다. 일년 365일 발행하는 뉴욕타임스나 시애틀타임스는 그보다 덜 걸리지만 신문배달의 상당부분을 우체국에 의존하는 코리아타임스는 주 5일만 발행하고 연방공휴일에도 쉬기 때문에 훨씬 더 오래 걸렸다.
한국일보 서북미 판은 지난 1977년 5월 1일 당시 워싱턴대학 인근에 있던 조병우 창간 지사장의 자택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LA 본사가 제작한 미주판을 매일 그레이하운드 버스 편으로 시애틀에 날러온 후 서북미의 주요 뉴스를 첨부해서 배포했다. 지금은 미국 굴지의 소수계 신문으로 자리잡은 한국일보 미주판(LA)도 1969년 창간 당시엔 서울에서 본국지를 비행기편으로 수송, 등사판으로 찍은 현지 뉴스와 함께 우편으로 배포했다.
본보 시애틀판이 처음엔 주 2회 또는 격일간으로 발행됐지만 본국 및 한인사회 뉴스에 갈급한 서북미 지역 한인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았고, 그 후 한인사회가 급성장하면서 본보도 일취월장, 10년만인 1987년 5월부터 명실공히 일간신문으로 자리잡았다.
본보는 한동안 서북미 한인사회 유일의 일간지로서 독자들에게 뉴스와 생활정보를 폭넓게 제공하는 한편 학술 세미나와 음악회, 미술대회, 축구대회, 골프대회, 바둑대회 등 각종 행사를 주최하거나 후원해 문화불모지였던 서북미 한인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본보는 창간 22년만인 1999년 7월 미주본사의 직영체제로 전환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2000년 10월10일 다운타운의 전세건물에서 오로라 길의 넓은 자체사옥으로 이사했고 바로 다음날인 10월11일 지령 4,501호부터 컬러인쇄를 시작했다. 모든 제작과정이 컴퓨터로 자동화됐고 AP통신의 최신 기사와 사진도 컴퓨터로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부터 우편 외에 직배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의 변화와 발전을 경험했다.
지난 2002년 10월23일자 지령 5,000호엔‘한국인 15명 캐나다국경 통해 또 떼거리 밀입국’제하의 기사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시애틀 방문을 앞두고 “자식들을 감방에 보낸 레임덕 대통령이 잠 못 이루는 시애틀의 밤을 지내지 않기 바란다”는 내용의 김현길 박사 고정칼럼이 게재돼 있다.
오는 2010년 10월중 발행될 지령 7,000호엔 어떤 기사와 칼럼이 실릴는지 알 수 없다. 또 6,000호를 만든 현재의 스태프가 그때까지 모두 근속할는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지령이 7,000호에 이를 때까지도 본보 스태프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작품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점이다. 4일 본보 식당 파티에서 직원들은 그 점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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