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의인 욥의 고통에 대해 친구들도 그리고 욥조차도 이 고통의 근원이 어디인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이 딱 한번 개입하시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의 이유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말씀만 하시곤 욥에게서 거두워졌던 복을 두 배로 갚아 주시기만 할 뿐이다. 그때 하나님이 ‘왜?’라는 물음에 대답을 하셨다면 ‘인간역사가 조금 더 순탄했을까?’ 아니면 ‘인생고가 조금은 더 가벼워졌을까?’ 혼자 자문해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질문의 끝은 ‘아니었을 거다’라는 애매한 문장으로 맺을 수밖에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이해 가능한 신의 섭리였다면 이미 그 순간 신의 뜻이 아닌 게 돼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폐암으로 7년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분이 받은 수술과 키모테라피의 횟수는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수준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그 분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셨다. 그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기억나는 건 “why not to me ? (왜 내게는 아니랴?) 이란 말씀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병이나 고통들이 자신을 피해서 가길 바라며 그 일들이 벌어지면 ”Why to me? 하고 묻지만, 의인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통은 언제든 누군가의 몫이 될 수 있다는 걸 목사님은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께 했어야 할 바른 질문은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가 아니라 ‘어떻게 이겨내야 하겠습니까?’가 돼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좀더 세세한 대답을 해 주셨을까? 사실 이것 또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들은 그 방법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세상은 전쟁과 기아의 소문으로 흉흉하고 도처에서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왜?”라는 질문만을 던져놓고 대답을 한가롭게 기다릴 수도 없게 인간역사는 무심하게 돌아간다.
질문을 “어떻게?”로 바꿔서 해결책을 모색해 본다면 적어도 우리가 처한 고통이 조금은 더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는 시처럼 우리가 신과 잠시나마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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