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유엔 수장으로 선출된 반기문(潘基文, 62) 외교통상부 장관은 워싱턴과 뗄 수 없는 인연을 지닌 외교관이다.
36년을 외교부에 근무하며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손꼽히는 그는 워싱턴과 크게 두 차례 공식적인 연을 맺었다.
그가 워싱턴에 처음 부임한 것은 1987년 8월, 전두환 군사정권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제11대 워싱턴 총영사로 그는 90년 7월까지 꼬박 3년의 임기를 채우며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동포사회의 신망을 얻었다.
80년대 말 워싱턴한인회장을 지내며 반기문 총영사와 손발을 맞추었던 오석봉 전 회장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대통령 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미국 조야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나쁘고 동포사회에도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며 “반 총영사는 부임하자마자 그 기류를 빨리 파악해 적절한 직무 수행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정부와 동포사회 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오 전 회장은 이어 “반 총영사는 대사관 직원들과 동포들과의 배구대회를 만들어 직접 출전할 정도로 마음과 몸으로 동포사회를 배려한 분”이라며 “그때의 성실성과 인간미가 오늘날 유엔 사무총장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이승수 탁구협회장은 “그분은 남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자세와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다른 이들을 포용하는 성격이었다”며 “사람들이 만나 이런저런 요청을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임했다”고 되돌아봤다.
반 장관은 1992년 주미대사관의 정무 공사로 부임하며 워싱턴과 다시 깊은 관계를 맺는다. 당시 그는 제1차 북핵 위기를 맞아 한미간 대북 정책 조율의 실무 책임자로 94년 제네바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열정을 바쳤다. 95년 2월 외교정책실장으로 귀임하며 공식적인 워싱턴 생활은 마감했다.
사실 반 장관의 워싱턴과의 인연은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1962년 충주고 3학년 때 미국 정부가 주최하는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입상하면서 이듬해 방미한 그는 워싱턴에서 미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그때 ‘최고의 외교관’이 될 꿈을 다졌고, 결국 외교관들이 가장 선망하는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방미 당시 그는 숙소를 제공했던 패터슨 할머니와 가이드였던 워싱턴의 터퍼 할머니와의 인연을 40년 이상 유지해오기도 했다.
외교부 장관에 취임해서도 워싱턴과의 특별한 인연은 이어졌다. 업무상 수차례 방미하기도 했지만 평소에도 워싱턴의 지인들과 전화나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각별함 때문에 그가 2004년 장관 취임 후 워싱턴을 찾았을 때 1백여명의 동포들이 환영연을 베풀어 주기도 했다. 김영근 워싱턴한인연합회장은 “그 바쁜 와중에도 며칠 전 전화를 직접 주셔서 동포들의 안부를 챙기셨다”며 “이런 마음씨가 인덕을 쌓고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산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1-03년 유엔 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재임중 유엔대표부에서 그를 보좌했던 권태면 총영사는 “초인적인 부지런함과 상하를 가리지 않는 부드러움, 절대 화내지 않는 인품이 돋보인 분”이라며 “유엔 사무총장 업무중에도 워싱턴과의 공식, 비공식 인연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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