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여행은 버림이다. 버리기 위해 떠나라는 말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지금껏 부산스레 떠났던 내게 누군가 여행벽두에 들려준 이 한마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길을 가면서 때묻은 나를 버리라는 말이다. 삶에 찌들어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아온 나를 보헤미안 시골길을 지나며 훨훨 날려보내라는 것이다. 세상 끝에 사는 낯선 인종들과 그 문화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어 버리라는 것이다. 봇짐을 내려놓고 오랜 역사가 서린 프라하 광장 모퉁이 카페에 앉아 차 향내를 맡는 여유를 부려보란 말이다. 조급함을 버리고 시간이 잠시 선 모습을 국외자(局外者)처럼 지켜보란 뜻이다.
예전의 여행에서 나는 떠나기 전부터 피곤하였다. 가장 싼값에 가장 많은 것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였다. 여행코스도 가급적 많은 곳을 돌아야 하고, 역사책도 서둘러 읽고 외우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한마디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떠났다. 그러나 여행 끝에는 늘 덜 채워진 듯한 미진함에 더 큰 피로가 몰려왔다.
이젠 얻으려는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닦은 창처럼 눈도 맑아진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함께 흘러가리라고 마음먹는다. 설사 내가 역사 한 조각을 지나쳤다해도 그리 대수가 아니다. 오히려 허물어진 농가의 지붕을 고치는 헝가리의 가족들을 보며, 비엔나 거리의 남루한 악사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기막힐 듯한 사연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상상력임을 깨닫게 된다. 상상하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이번 2주간의 동유럽 여행 가족들의 반장 격인 클라라님은 테마와 이야기가 있는 여행을 제안하였다. 보헤미안처럼 떠나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M님을 인솔자로 만났다. 그는 학창시절, 수년 간 세계를 배낭을 지고 다녔던 역사학도였다. 책에서 배운 역사를 발로 체험하며 살아온 젊은 분이었다. 그가 걸었던 땅의 역사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누에가 실을 풀듯 잔잔히 풀어헤치는 해박하고 호감 가는 길동무를 만난 셈이었다.
“역마살이 낀 제가 세계 방방곡곡 다녔던 곳들 중에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사람들은 물어봅니다. 저는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지요. 결코 세상절경이 아닙니다. 제가 젊은 날,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경포대 백사장입니다. 바다 경치는 수수했어도, 내 뜨거운 마음과 아내의 미소가 지금도 선명하게 제 마음속에 박혀 있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우리의 사연이 담긴 곳입니다.”
그는 또 말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의 한국방문을 도운 적이 있지요. 2주간 우리 나라 명승지와 유적지를 낱낱이 돌아본 후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신도시 일산을 꼽았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성냥갑 같은 아파트 군들을 바라보면서 4차원의 세계를 보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행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접고 가장 그 나라다운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다. 집시처럼 떠나자. 여행은 감성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내 사연을 심는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사람들의 사정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유유하게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 선입견과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본전을 뽑으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여행은 내가 있어야할 곳에 결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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