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경
그러니까 몇 달 전 이야기이다. 영어의 new imperialism에 대해 agree냐 disagree냐는 아이의 질문이 있었다. 그것이 무언 말인고? 엄마된 자의 도리로 정다운 눈초리를 보내니 일찌감치 알아차린 아이는 짧은 한국말로 10분을 넘게 설명을 곁들인다. 요약하자면 영어가 신종 제국주의가 되어 현대 세계를 지배한다는데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묻는 질문이었다. 세계사 시간의 에세이 주제에 뾰족한 의견이 없던 아이의 구원 요청에 신통한 의견을 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흠! 미안하나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 훗날 이야기 하자, 네 생각부터 말해 줄 수는 없겠니 하며 당장을 모면하긴 했어도 부시류의 네오콘 세력에 대한 반미 감정이 세계 곳곳에서 표출되는 요즘 그 화두는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될 때 통상 불어로 만들어 왔던 외교 문서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 의해 영어로도 작성되었고, 그 일이 영어가 정치 외교 사회 전반에 걸쳐 국제 공영어가 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한다. 이미 100년 전에 영어의 신 제국주의를 계획한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국가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는 우위에 서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간다. 내가 자랄 때도 팝송 가사 하나쯤은 외워 불러야 근사한 사람으로 보였고 그래서 카세트 테이프를 뒤로 돌리고 돌려가며 팝송 가사를 받아 적던 기억이 있다.
첫울음으로 세상에서의 시작을 알리고 그 이후 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언어야말로 문명 사회에서 살아남을 창과 방패일 것이다. 더군다나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서 배우는 모국어는 그 민족의 문화는 물론 민족혼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새 세계는 모국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 있다. 영어를 강요한다는 말에는 영어식 사고도 물론 포함된다.
세계의 60% 나라에서 초등학교부터 영어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는 태교할 때 이미 영어를 들려주며 3살에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하루에 열 단어 이상 암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원형 탈모증까지 나타난다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몽매함을 치마바람 어머니에게만 물을 수도 없는 형편이라 사정은 더욱 딱하다. 이젠 한국 대기업의 입사 시험에 영어 논술이 포함되는 모양이다. 국제화 시대의 어쩌구라는 취지가 포함되겠지만 높아진 토플이나 토익 시험점수로는 그 능력을 변별하기 힘들다는 계산 또한 넣었을 것이다. 산 넘어 산이라고, 떠나온 곳이라도 조국의 청춘들이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일단 영어가 되어야 장밋빛 미래를 보장받는 사회로 세상이 내몰리는 현실을 볼 때 영어는 형체 없는 군주로 재창조되어 있는 셈이다. 다만 그 새로운 군주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시간과 돈과 정열을 바쳐 섬기는 일이 바벨탑을 세우는 교만과 어리석음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훌쩍 커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일만큼 대견한 일이 있을까.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태생적 마이너리티를 감수하고 그 주제에 대한 자료를 모아 두 페이지나 되는 에세이를 쓰는 아이의 모습이 신통하기만 하다. 게다가 그 에세이를 쓰게 한 세계사 선생님이 순 백인이라는 것이 또한 즐겁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어 있음을 빌미로 군사적 우위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주의를 염려하는 지성의 목소리를 백인의 남자에게서 듣는 일, 의외로 그런 양심의 지성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 미국을 지켜가는 힘일 것이다.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한국어를 간직하고 익혀가고 그래서 여러 민족의 개성이 존중되고 어울려 갈 때 미래는 더욱 밝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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