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시인)
이곳 북가주에서는 눈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겨울이 되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옛 친구가 생각난다. 돈을 아끼느라 서로의 머리도 잘라 주었던 친구. 귀 밑에서 더 길어 보려고 아주 조금만 잘라내어 미장원에 자주 가야 했었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교 방과후 서로의 머리를 잘라 주었던 친구. 그리고 별로 몸매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허리 선을 드러낼까 하여 교복도 과감하게 수선했던 친구. 나보다 가정 형편이 좀 나았던 친구는 늘 자기의 용돈을 나와 나누어 썼다.
어쩌다 우리가 고작 오뎅 떡볶이를 먹는데, 뭐 그리 이름난 곳을 찾아 가겠다고 영등포에서 종로까지 버스 회수권을 낭비하며 갔었는지 모르겠다.
작은 건더기 하나 더 주면 좋으련만 먼 길을 찾아 왔다는 데도 어림 한푼 없이 가격에 따라 주문한 대로만 주던 그 분식점 아줌마!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음식이 꿀같이 달은 입은 쇠라도 녹여 먹을 수 있었는데 주머니 형편상 오뎅 떡볶이로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노점 각 곳에서 유혹하는 오징어 새우 닭 튀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가지런히 놓인 김밥은 우리의 작은 눈을 김밥만큼 커지게 했다. 지글지글거리는 부침은 군침을 꿀꺽 삼키게 했다. 서로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슬쩍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었다. 저기압이면서 바람이 부는 날은 냄새로 인하여 더욱 배가 고팠다.
아무리 우리의 주머니 속을 이리 저리 만져보아도 동전 하나 잡히지 않았다. 낭비한 버스 회수권도 만회할 겸 두어 시간을 걸어, 걸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천천히 걸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더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비에 젖어도 눈에 젖어도 마냥 그렇게 걸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이 다음에 뭐가 될까 하다 수녀가 되자 했었다. 왠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난하여도 우리 마음만은 깨끗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내가 미국에 온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는 그 친구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에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나의 형편이 퍽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의 가난했던 때를 추억으로 간직하며 오뎅 떡볶이를 직접 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요리솜씨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살갑게 지내던 그 친구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역시 친구는 옛 친구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면서 옛 친구와 함박눈을 맞으며 걷던 날을 생각하며 눈에 대한 서정을 그려본다.
눈(雪)
보일 듯 말 듯
뒷전에 서있는 안개꽃처럼
전하지 못하는 마음
눈 부신 은빛 날개 달아
억 만개로 피어난 사랑
장난끼 많은 사내 아이 같은 바람이
눈치를 채고
그 많은 꽃잎마다
새겨진 비밀을
지천에 소문 내고 말았으니
길 바닥까지
엎드리어 애원하다, 애원하다
시린 눈물 남기고 돌아서네
그저… 바라만보고
서성거리던 이들의 신발과 옷깃에
스며든 눈물
가슴 꿰뚫고 들어와
사연 무성한
꽃이 되네
시들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온 몸으로 피는 별꽃에
때 늦은 이름표를 다느라
하얗게 물들이는 이 밤도
많은 이들
잠들긴 힘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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