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다리에서
김희봉(수필가)
여행은 집시의 길을 밟아감이다. 정처 없이 떠난 그들의 서러운 눈물자국을 느껴봄이다. 보헤미안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원한 방랑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낭만적이면서도 왠지 슬퍼 보이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삶에 지친 듯한 집시들. 그들의 현란한 춤과 노래 뒤엔 외로움과 모멸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집시는 약 14세기 경, 북인도에서 유럽으로 흘러온 유랑민들입니다. 이집트인인 줄 알고 집시라고 불렀지요. 수백만 인구 중에 많은 수가 체코의 보헤미안 지방에 모여 살게 돼 보헤미안이라 불려졌습니다. 그들은 춤과 노래에 능하고. 점을 치거나 구걸로 연명해 왔지요 인솔자 M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보헤미안이란 말은 19세기말 파리를 중심으로 모였던 자유분방한 예술가들 - 작가, 배우 등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낭만적인 지식인들도 함께 일컫게 되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가을밤에 프라하에 당도했다. 몰다우 강에 놓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를 다리. 33성인의 조각상들로 장식된 너른 다리엔 넘실대는 관광객들과 거리의 악사들로 축제의 밤인 양 뜨거웠다. 백탑(百塔)의 황금도시로 불리는 이 중세의 성채는 소문대로 조명을 받은 수많은 첨탑들로 밤하늘이 빛났다.
눈을 드니 언덕 위에 프라하의 성채가 우뚝 솟아있다. 강력했던 카를 4세가 14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를 때 개축해 수백 년 동안 수도를 지켜온 웅장한 성. 헌데 이 성은 카프카가 끝내 들어가지 못했던 청동빛 감도는 권세의 성이기도 했다.
20세기 대표적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성 아래 골목길에서 성실한 소시민으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황금소로란 멋진 명소가 되었지만, 예전엔 연금술사 같은 장인들이 살던 후미진 곳이었지요. 유태인 백정으로 출세욕에 불탔던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법을 전공했지만 그는 글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보험사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변신(變身)같은 문제작들을 썼지요. 결국 폐결핵으로 41세에 성밖에서 죽었습니다.
인솔자가 안내한 카프카의 옛 쪽문 집은 그의 이름을 단 카페가 돼있었다. 생각해보면 카프카 자신도 20세기 외로운 집시였다. 그도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 미아(迷兒)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속의 체코인, 그 중에서도 독일어권에 속했던 소수민, 유태교를 믿지 않았던 유태인, 그런가하면 상술과 명예욕이 강했던 아버지의 속물근성과 단조로운 직업의 옭매임으로부터 끝없이 달아나고 싶어했던 심약한 사내였다. 문학에의 열정과 안락한 삶을 누리고픈 갈망 속에서 고민하고 자학했던 그는 외톨이 방랑자였다. 소설 변신에서 하루밤새 변한 끔찍한 벌레는 실종된 자신의 내면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석양 무렵, 옛 시청 광장 고딕 건물에 걸린 천문시계 앞으로 갔다. 명동 인파처럼 관광객들이 운집해 있었다. 1410년 지동설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이 시계는 여전히 정확할 뿐 아니라 체코의 보물답게 예술적 장식이 눈부셨다. 이 천문시계 곁에 붙은 조각품들을 보세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인간은 죽는다는 상징으로 해골이 서 있지요. 그 곁에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사내. 돈 부대를 움켜진 수전노, 그리고 수금을 켜는 쾌락과 권력욕의 화신이 시간을 따라 돌고 있지요.
인솔자 M님은 독백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집시 같은 우리 인생은 무엇을 향해 시간을 따라 돌고 있나요? 광장 옆자리에 엎드려 동냥을 하던 집시여인 하나가 맞은 편 우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달픈 사연을 담은 듯한 그녀의 시선이 지쳐 보였다. 저 집시여인의 방랑과 내 삶의 여정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겉으로 보이는 내 행복이 결국 시계 속의 사내가 든 거울에 불과한 게 아닐까?
정각이 되자 시계장식들이 정교하게 움직이고 관중들은 큰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벌레들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집시여인만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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