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한 많은 청춘을 돌려주세요”
“1926년생 김군자입니다. 또 창피스러운 거(얘기) 하겠군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중 한명인 김군자 할머니(81)가 10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As Long As I Live)을 주제로 샌프란시스코 정치교육센터에서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증언 집회가 시작되자 통한의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고아로 성장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3년이라는 고통 이상의 시간을 참석자들에게 들려줬다.
“일본어를 몰라서 가만 있으면 말을 않한다고 계속 때렸어요. 그래서 괴로워서 죽으려고 목을 메기도 했지요. 하지만 주인에게 들켜서 죽는 것보다 더 맞았어요”
김 할머니는 당시의 아픔이 밀려오는 듯 긴 한숨을 쉬면서 “(지린성)훈춘시에 있다 고까시(훈춘시 근처의 작은 지명, 일본식 발음)로 군인들을 따라 갔는 데 전쟁을 하면 할수록 군인들은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며 “단도로 옆구리나 허벅지를 장난삼아 돌려서 찌르기도 했다”고 말로 표현하기 조차 힘든 당시의 생활상을 설명했다.
6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 상처들은 마음과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그는 “나는 이것이 너무 창피하고 그렇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그래서 한국에서 미국까지 이 사실을 알리려고 왔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81세가 됐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한맺힌 세월을 살아오면서 매일 아파왔고 언제 이승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일념뿐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일본 정부에 사과받고 배상받고 싶은 거예요. 배상 받아서 나처럼 불쌍한 사람 공부하는 데 주고 싶어요. 나의 81년 청춘을 돌려주세요. 한이 너무 많아요”
지난 한해만도 18명의 종군 위한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도 못한채 생을 마감했다.
김 할머니는 증언 집회를 끝내며 “일본은 부끄럽지도 않나요”라며 “배상을 하지않는 일본 정부는 짐승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로 울분을 토해냈다.
한편 이번 집회는 석혜인(CalsArts 대학원)씨의 사비와 CalsArts 후원금, 학생 및 일반인들의 후원금으로 마련한 행사로 석 씨가 제작한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함께 살고 있는 ‘나눔의 집’의 생활과 이들의 고통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상영됐다.
LA지역에서 7일부터 열린 집회를 마치고 10일 샌프란시스코, 11일 오클랜드 아시안 아메리칸 문화센터, 12일 버클리 헬러 라운지(Heller Lounge) 등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 집회는13일 스탠퍼드대(Tresidder Cypress North) 에서도 개최된다. 이어 15일 워싱턴DC에서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이 지난달 31일 미의회에 제출한 한국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지지하기 위한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다.
<김판겸 기자>
pa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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