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으로 사는 맛
친정쪽이나 시댁쪽이나 워낙 형제자매가 많아 대가족이고 교우관계가 훌륭(?)하다 보니까 ‘나 한국와서 둥지 틀었다’고 알리는데만 두세 달은 꼬박 걸린 것 같다. 그 중 제일 반가운 소리는 김장김치 맛있게 익었다고 가져다 먹으라는 엄마와 올케언니들의 전화이다. 얼마나 그리웠던 맛이며 해 보고 싶은 일이었던지.…. 친정 가서 냉장고 열고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것 보기라도 한 듯이 엄마 이거 줘 저거 줘 해서 낑낑거리고 싸들고 나올 때,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는 어머니와 무겁다고 굳이 택시를 불러다주시는 아버지가 계신것도 너무나 고마웠다.
돌아와 우리 집 냉장고에 채워넣으면 부러울 게 없었다. 게다가 올케 언니들은 나를 아직도 ‘아가씨’로 불러준다. 세월이 결혼 전 철없는 막내 시누이에 잠겨있다는 것이 더욱 기분좋게 만든다. 그래서 ‘언니이~’하면 손수 달인 매실 엑기스 같은 것들이 덤으로 딸려왔다. 시아버님께서는 나와 아이의 교통카드에 거금을 충전해서 마련해 주시거나 하면서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주셨다.
친구들은 이제 생활의 여유가 생겨 그런지 대부분 부엌에서 떠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거지 대장이 죽어가면서 부하들에게 유산을 남기는데 누구에게는 밥통을 누구에게는 숟가락을 그런 식으로 가진 것 몽땅 물려주고 나서 가장 아끼는 심복에게 달랑 종이 한 장 주면서 동네 부잣집 식구들의 생일과 잔칫날이 적힌 가장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하라고 했다는 우스개가 있는데, 그렇게 부엌을 떠나있는 친구들은 돌산 갓김치, 전라도 알타리 김치, 어느 집 재래 된장 고추장 등등 전국 각지의 맛집 전화번호와 목록을 그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갈고 닦은 노하우와 함께 알려주거나 데려가 먹여주거나 그랬다.
우리가 누구인가.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간 낚싯배까지 짜장면이 날라오는 한국, 그야말로 배달의 후예 배달민족 아닌가. 아파트에는 수시로 택배회사 차가 드나들고 전화 한 통이면 온갖 산해진미부터 심지어 속옷까지 하루만에 우리 집 문 앞으로 도착했던 것이었다. 아마 조선 시대 왕족도 이런 호사는 못 누렸을 것이다. 한국은 대단히 싱싱하고 왕성했으며 기발하고 재미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한 달도 채 안되어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은 학교에서 기말고사도 끝나고 방학을 앞둔 분위기라 새로 사귄 친구들과 버스 타고 삼성역에도 가보고 영화 구경도 가고 떡볶이 사먹는 즐거움도 누리고 PC방 노래방까지 섭렵하면서 한국의 패거리 재미를 톡톡히 보았는데 방학과 함께 친구들을 학원에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가족모임에서 청소년들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원에 있어요, 시험이에요, 하면 모든것이 용서되는 듯 보였다. 가족에게서 실종된 아이들은 늦은 밤 학원가 거리에서 김밥으로 배를 채우거나 하면서 그들만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학원에 가야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오며 가며 잠깐 얼굴만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심드렁해진 아이는 내 옆을 그림자같이 붙어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눌한 한국말 때문에 그랬는지 무엇이든 나에게 미루고 의지하려고 했다.
어디 가서 햄버거 하나 사먹으려 해도‘엄마가 해줘’ ‘엄마가 말해’ 그렇게 말해서 드디어 천사 엄마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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