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바람을 앞세운 빗줄기가 거세더니 봄이다 봄. 찬바람 마다 않고 저 먼저 피어난 꽃나무를 탄성을 지르며 바라보게끔, 봄은 연분홍 축복이 되어있다. 따라온 어린 초록은 시작의 기운을 전하고 그 풍경의 언저리에 부서져 내린 햇살이 아련하다. 저 산이 저 들이 꿈속에 있는 중이다. 겨울이 가면 다시 맞는 계절이라고, 노곤하고 배시시한 계절이라고, 꽃 바람에 눈길 한 번 주고 말면 그 뿐이던 계절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봄의 그 생명에 애틋함이 생긴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바람이 아니고 햇볕이었던 것처럼 겨울 내내 한기를 막아준 고마운 재킷이 어쩐지 거북하고 무거워 오늘 다시는 찾지 않을 것처럼 벗어 두었다. 옷장을 뒤져 밝고 가벼운 스웨터를 찾아 보는데 두 번의 이사로 얼마 되지 않는 살림이 온통 밖으로 튀어 나온다. 도대체 작년 봄에는 무엇을 걸치고 다녔던 거람.
한국에서 보냈던 지난 봄날은 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연분홍 치마는 아니지만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라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나름대로 치장을 하고 나서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직도 머리에 쪽을 치신 할머니 한 분이 부대자루에 담아 내온 쑥이며 냉이며 푸성귀들을 정류장 한 켠에 펼쳐놓고 신문지를 깔고 앉아 무념 무상하게 오르내리는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으로 나를 유혹했었다. 봄기운이 나른해서,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음으로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 푸성귀 공부를 시작했다.
할머니 이거 냉이잖아요. -응.
직접 캐오신 거에요? -응.
그렇구나 향기가 무지 좋아요. -응.
이건 뭐에요? - 응?...비름.
맛있어요? -응.
어떻게 먹으면 맛있어요? -고추장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트리고…
냉이랑 달래랑 산나물이랑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아 한껏 멋 낸 핸드백 옆에 주렁주렁 달고 하루 종일 돌아 다녔다. ‘할머니 들어오다 살게요.’ 그렇게 말한다고 노여워할 할머니도 아니었건만 냉이 뿌리에 남은 흙을 털어내는 할머니 손마디에 엮여있는 봄이 왠지 다정했다. 할머니가 보냈을 그 많은 봄날의 인내를, 단순함을, 자연을 한마디 말로 두고 오기 송구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이었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준 뒤에는 다 비워내는 신이었다. 오직 그들과 더불어 있을 경우에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무례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쟝 그르니에의 책에 인용된 까뮈가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다 쓴 구절이다.
까뮈가 살아있다면, 그 누군가가 버스 정류장 한가한 모퉁이에 봄을 내다 놓은 할머니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봄날이다. 다 비워내면 가득 채워주는 봄날의 햇볕이 따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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