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종교나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지성인이 갖추어야할 덕목입니다. 이번 주간은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시 하게 여기는 고난 주간입니다. 그 고난의 끝에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사신 마지막 주간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메시지와 수많은 비유와 가르침이 그 마지막 한 주간에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메시지와 일치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행하기 싫어하는 말씀을 하면서 각종 고난을 당하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고난주간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우리와 ‘함께’(companionship)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해 에덴 동산에서 ‘함께’ 하기를
원했기 것입니다. 노예로 부려먹기 위하여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강요해서 배를 채우려는, 거짓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입니다.(요일 4:8).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어 본질(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면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물고기가 물 떠나면 죽음입니다. 또 본질인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신 비본질인 형식과 함께 하고 삽니다. 종교 의식은 많은데 하나님과 하나 됨이
없어졌습니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하나 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 죽인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 27:26)고 외치면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그 유대인은 역사 속에서 엄청난 피 값을 치루며 살고 있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가출해 창기가 되어 제멋대로 살던 아내를 돈 주고 데려와 아내로 다시 삼았습니다. 호세야 선지자는 그 처절한 사랑만큼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십자가에 매 단 우리와 다시 함께 하려고 그 사랑의 깊이만큼 깊은 고통의 길을 간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 신의 음성을 들으면서 껍데기와 형식으로 찌들어진 ‘종교적인 삶’을 반성합니다. 신과 함께 하는 희열과 생명의 시간들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사랑은 그 깊이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에셀 나무를 심으며…
글 : 호성기 필라 안디옥 교회 담임 목사
삽화 : 오지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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