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보고를 위해 찾아오는 부부 고객들 가운데 아내의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정확히 통계를 산출하지는 않았어도 최소 80%는 넘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없는 남편의 위임을 받거나 단순한 심부름으로 볼 수 있겠으나 부부가 같이 와서도 앞에 앉아 직접 상담하는 것은 대부분 그 부인이며 남편은 뒤에 놓인 의자나 옆 자리에 앉아 기껏 조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서 한인 가정의 실권은 이미 아내에게 옮겨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적으로 아내가 집안 살림을 맡고 있으니 가사에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겠으나 가정의 모든 경제권마저 송두리째 장악한 것이 아닌가, 바꿔 말하면 종전에 남편이 누리던 가장의 위치가 아내에게 옮겨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편이 가졌던 가부장적 권위란 바로 경제력에서 나왔었다. 하지만 남편이 경쟁관계에서 힘이 부치고 아내들의 사회활동이 보편화되면서 가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증대하다 보니 의사를 결정하는데 아내의 목소리에 자연 힘이 실리게 된 것이리라. 이제는 ‘가장=남편’이라는 등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두가 시대적 조류라서 누굴 탓할 수 없지만 남편의 위상이 축소된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라 과히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남편 수난의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소위 ‘기러기 아빠’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교육제도 붕괴는 조기 유학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불러왔고 그 최대의 희생자는 바로 남편들이었다. 함께 모여 단란하게 살아야 할 가족, 특히 부부가 쪼개져서 아내는 자녀와 함께 유학지로 떠나버리고 남편은 국내에 남아 돈 벌어대는 기계로 전락하였다.
그나마 든든한 직업이라면 몰라도 50세가 넘으면 골동품 취급받는 분위기 속에서 남편들의 처지는 자꾸 좁아져 갔다. 직장에서 버림받은 남편들이 찾아갈 곳은 어딘가? 위안을 받아야 할 가정에서조차 며칠 뒤부터는 아내의 곱지 않은 눈치 속에 내 돈마저 타 쓰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비록 사회적 물의는 계속되어도 많은 가정이 주택이나마 장만한 것과 엄청난 교육비를 감당하는 일이 아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남편들의 수입만으로는 도저히 그런 재산을 축적할 수도 없었거니와 수백만원 대의 과외공부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아내들의 그런 극성스러움이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하게 된 셈이다.
이곳 미국이라고 크게 다른 바가 없다. 한인 남편들이 경험 부족과 언어의 어려움으로 변변한 직업을 얻을 수 없다보니 이민초기부터 아내들이 맞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오늘날 많은 남편들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밀린 채 또 다른 형태의 왕따를 당하며 고독자의 소외감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자존감 강하고 급한 성격의 한인 남편들이지만 앞으로 아내의 도전은 불가피한 추세이며 남편이 옛 위상을 되찾기란 백년하청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미 세상은 ‘여인천하’가 되어버렸다.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어릴 적 종종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사내란 지게를 지더라도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느니라.”
외할머니는 벌써부터 오늘 날 남편들이 당할 수난을 예견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말 타고 창검을 휘두르며 만주대륙을 달리던 위세당당한 주몽이나 대조영이 새삼 부럽고 밭 갈고 그물처서 먹고 살던 농경사회가 남편들이 기를 펴던 태평성대가 아니었나 싶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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