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 국도는 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포구까지 섬진강을 동쪽으로 따라 내려간다. 강을 따라 출렁거리며 바다 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지리산의 연봉들은 점점 더 넓게 품을 벌려서 화개나루를 지나면 강의 굽이침은 아득히 커지고, 굽이침의 안쪽으로 넓고 흰 모래톱이 드러난다.
작가 김훈의 자전거여행기를 읽고 섬진강을 그리워한 게 어찌 나뿐이었으랴. 그러다가 올 초, 광양제철소의 승안 형제에게서 문안이 왔다. 형님, 섬진강에 봄이 왔습니다. 구름송이처럼 흐드러진 매화 숲을 혼자보기 아깝습니다. 수년간 이곳 북가주에서 함께 살다가 얼마 전 영전해 귀국한 아우의 소식은 꽃내음에 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서울 나간 다음날 광양으로 향했다. 남해 끝임에도 우등버스로 불과 4시간 여밖에 안 걸린다. 대전 거쳐 덕유산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경상도 진주 땅을 돌아 다시 전라도 동광양에 이른 4월의 한반도는 벌써 짙푸른 봄의 흥취가 완연했다. 배낭하나 달랑 메고 낯선 남도 땅을 돌며 동가숙서가식하고 싶었는데 그 과분한 꿈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광양제철소는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항공모함 같았다. 10년 동안 불철주야 바다를 메워 여의도의 5배나 되는 456만평의 광활한 매축지 위에 세워진 철의 도시는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쇳물이 흘러 연 1900만 톤의 철강을 만들어내는 제철소는 하나의 활화산이었다.
거대한 제철소 굴뚝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거꾸로 올라갔다. 김훈이 자전거를 밟으며 물에 잠긴 지리산연봉을 바라보던 그 길이었다. 햇살비늘이 반짝이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아!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 물길이구나 하는 벅참이 밀려왔다. 직선 제방으로 규격화된 한강이나 바다 같이 넘실대는 낙동강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느릿느릿 구비치는 강물이 흰 모래톱을 어루만지며 돌아가는 정취가 온화하고 정겹다.
금새 매화마을에 다다랐다. 10만 그루나 되는 매화나무들이 폭죽처럼 하얗게 꽃을 터뜨리는 춘삼월이면 온 마을이 흰 구름에 쌓인 듯하다고 했다.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청매실 농원에서 나비 떼처럼 팔랑팔랑 흩날리는 꽃잎파리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매실을 저장한 3천여 개 장독들이 생명을 잉태한 새댁들처럼 양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농원의 도우미가 설명한다.한겨울 눈밭에서 봉우리를 맺는 매화는 마른 가지에 꽃 피우지요. 떼지어 핀 매화는 3월 절정일 때 흐드러집니다. 그러나 매화가 질 때면 꽃 한 잎 한 잎이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하지요.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그 찰나가 매화의 절정입니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러하지요매화의 죽음을 풍장()이라 한 작가의 구절이 생각났다.
섬진강물에 발을 담근다. 아직 차지만 맑고 정갈한 강물이 발목을 감싼다. 언 땅을 녹이는 물. 생명을 살리는 봄의 강물. 문득 춘수()란 아호를 지니셨던, 돌아가신 장인어른 생각에 옷매무새를 고친다. 환도부터 80년대 초까지의 격변기에 전경련() 살림을 꾸리시며 우리 나라 경제의 증인으로 사셨던 어른. 그러나 검소하셔서 청계천 바닥에서 사신 구두를 구멍 날 때까지 신고 다니셨던 어르신.
한겨울 눈밭에서 태어나, 분수 지키며 사시다가, 매화꽃처럼 훌훌 떨어져 강 따라 흘러가신 어른께서 오늘 같이 좋은 봄날, 내 언 가슴을 어루만져 주신다. 봄볕 강물() 흐르는 섬진 나루에서 장인께 큰절 드리고 화개장터로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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