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가 탈출했다. 그것도 떼로 5,000마리씩이나.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닌 이 실제 상황은 두 달 전쯤 부다페스트의 한 고속도로에서 벌어졌다. 당시 토끼를 싣고 달리던 트럭이 다른 차량과 충돌하면서 짐칸에 있던 토끼들이 쏟아져 나와 고속도로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달려라, 토끼’를 연상시키는 이 짜릿한 기사 제목만을 보곤 고속도로 위를 맹렬하게 달리는 토끼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웬걸. AP로 타전된 사진 속 토끼들은 상상처럼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하얗고 탐스런 털을 가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들은 뜀박질은 고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속도로 위에 멍하게 서 있거나 잔디 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그때의 배신감이라니.
아마도 이들은 집토끼로 길들여져 한번도 탈출이라든가 맹렬한 질주 따위를 해본 적이 없었던 듯 싶다. 분명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디 토끼만이겠는가. 주변을 둘러보면 노동보다 휴식을 더 낯설어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과형 인간’부터 휴가 내내 쉬느라 날린 하루 매상에 집착하는 ‘안절부절 형’, 내가 없으면 조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휴가는 꿈도 못 꾸는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형’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쉬지 못하는 이유는 천만 가지도 넘는다.
인간의 본질엔 호모 파베르(연장을 만들어 쓰는 사람)말고도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놀이하는 인간’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언제 잘 노는 법을 부모나 학교에서 배워 본적이 있었던가 싶다. 성과 제일주의에 사로잡혀 휴식조차 커리어를 위한 자기계발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템 개발 같은 또 다른 노동에 투자하는데 더 익숙한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일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헤겔 연구의 권위자인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는 자신의 논문 ‘시간의 경제’에서 현대인들은 자유시간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물론자 입에서 웬 노는 이야기?’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헤겔 연구가 입에서 노는게 언급될 만큼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노동에 얽매여 온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허구적 욕구를 재생산해내 자유시간조차 노동이나 업적을 위해 쓰이는 휴식이 돼 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시간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양이 눈부신 여름 휴가철이다.
굳이 아른트 교수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일년의 절반을 쉬지 않고 달려온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일용할 휴식이니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주현 / 특집2부 차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