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북가주의 올드타이머, 정 용환 선생께서 뜻밖에 소천하셨다. 품성이 따뜻하고 인격이 높으신 어른이었다. 내게는 삶의 모습을 닮고싶은 스승이기도 하였다.
선생을 처음 뵌 게 십여 년 전 일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정 프란시스콥니다. 정겨운 울림이 있는 바리톤 목소리와 함께, 지금도 선명한 첫 대면의 느낌은 그의 따뜻한 미소였다. 당시 갓 환갑을 지나셨는데 뺨에 온기가 넘치는 동안(童顔)이셨다. 멋지게 웨이브진 반백의 머리에 안경 속의 눈매가 서늘하신 신사의 풍모였다.
선생은 참 겸손하신 분이었다. 한참 손아래 후배들에게도 꼭 예를 갖춰 대하셨다. 여행을 가서도 남들 배려가 몸에 배어 당신은 한사코 문간 바닥에서 주무시기가 일쑤였다. 부지런하신 덕에 단체의 궂은 사무일을 도맡아 하셨다. 장거리 여행 때는 가이드들도 챙기셔서 후에도 젊은 그들과 허물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셨다.
선생은 대단한 실력파셨다. 오랫동안 연방재무성 금융감독관으로 계셨는데 특히 영어실력이 출중하셨다. 그가 영어로 쓴 글을 접할 때마다 유려한 필치와 방대한 어휘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논리적이면서도 정감어린 글들이었다. 이민 일세임에도 원어민들을 능가하는 그의 세련된 언어감각이 참 부러웠다. 아마도 수천 권이 넘는 독서량에서 쌓인 저력인 듯 싶었다. 그러나 내색하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선생은 자원봉사에도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인 성당에서 영어로 처리해야되는 대내외적 업무나 장례에 관한 일들을 신부님을 도와 선생께서 도맡다시피 하셨다. 뒤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봉사하신다고 아는 교우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돌아가시기 전 주까지 성당의 노인들을 위한 컴퓨터 강좌를 개설하셔서 열심히 동분서주하셨다.
선생은 매사에 열정을 갖고 임하셨다. 결혼생활도, 직장일도, 신앙생활도, 배움도, 건강관리도, 자식사랑도, 이웃봉사도, 은퇴생활도 모두 진지한 준비와 뜨거운 가슴으로 임하셨다. 은퇴 직후 좀 쉬실 만도 한데 대학에 등록, 중국어 공부에 열정을 쏟으시는 모습을 보고 매순간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의 삶을 깊이 흠모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성(靈性)이 맑으셨다. 지난 가을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멜크(Melk) 수도원’에 들렸다. 긴 회랑을 걸어나오면서 선생은 옛 어느 수도원 얘기를 들려주셨다. “수도원은 17-18세기의 박해와 19세기 세속주의로 점점 쇠퇴해갔지요. 어느 날, 수도원장은 기도 중에 마지막 남은 다섯 수사 가운데 메시아가 있다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들은 누가 메시아인지 모르지만 서로를 메시아 대하듯 사랑과 존경으로 섬기며 살았답니다. 수도원은 작은 천국이 되었지요. 우리들도 우리 이웃들 속에 메시아가 계시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면 좀 더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두주 전, 선생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청송(靑松)처럼 인격자의 품위와 믿는 자의 신실함을 지키며 사시다가, 수(壽)를 다하매, 동백처럼 이 세상 인연의 줄을 미련없이 놓고 천국으로 향하셨다.
부인 샌드라 여사께서 부군의 마지막 길을 전송해 달라고 주위분들에게 부탁하셨다. 나도 충격과 슬픔 속에 십자가 달린 그의 관을 함께 매었다. 장례 미사장에서 양지바른 장지까지 그를 옮기면서 나무 관 위에 가만히 손을 대어보았다. 멋있는 신사이자 인간미 넘치던 스승의 체온이 아직도 따뜻했다.
장례 후 처음으로 부인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뜻밖에 정 선생께서 받으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음성우편함에 녹음된 선생의 육성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울림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목이 메었다. 당신께서 생전에 메시아처럼 사랑으로 섬겨주시던 부족한 모습 그대로의 이웃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앞으로도 풋풋이 살아계실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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