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법정에 증언하러 가면 “진실만을 그리고 모든 진실을 말하겠노라” (Nothing but the truth, and all the truth)고 선서한다. 그러나 막상 모든 진실을 밝히려고 하면 상대편 변호사측에서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 하면 상대방에게 불리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라고 요구하고선 유도심문 식의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이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광폭한 행동을 했습니까?” 같은 질문이다. 여기에는 ‘했다’ ‘안 했다’로 대답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입원 전에 너무 광폭하게 행동해서 입원하자마자 항정신약물 근육 주사를 맞고서 부터는, 식사 및 용변시간을 빼고는 거의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고, 이유는 …” 하고 설명을 하려면 “묻는 답에 만 ‘예, 아니오’로 대답하시오” 라는 요청을 받는다. 처음부터 모든 진실을 듣기보다는 자신들의 법정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일부의 진실만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각종 민형사 소송, 살인사건, 강제입원, 강제치료 등 사건에 증인으로 수도 없이 많이 출두해 보았지만, 지난 30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미국법정에서는 모든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도 혹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인숙 살해 사건과 그녀의 아들이 누구의 자식이냐가 한동안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언론에서는 대통령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했고, 대통령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수록 국민들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 박 대통령에게 섹스 스캔들 의혹만 깊어졌다. 수십년이 지나서야 그 아이가 그 시절 국무총리의 아들인 것이 밝혀졌지만, 돌아가신 박 대통령은 자신이 누명을 쓰면서 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만일에 그 시절에 자신은 아니고 누구누구의 자식이라고 진실을 밝혔더라도 국민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해명이 되지 못했으리라. 오히려 자신의 비리를 부하에게 뒤집어 씌워 속죄양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밝힐 수 없는 진실, 밝혀봐야 믿어주지 않는 진실, 밝혀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진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세월이 지나서야 진실이 밝혀지고, 진실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진실이 너무 뜨거울 때는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미지근해져야 받아들이는 수도 있다. 진실의 진위 보다는 진실의 온도가 대중의 납득여부를 결정하는 수도 많다.
강간살인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살다가 유전자 감식 법으로 진범이 잡힌 후에야 반평생의 무고한 수감생활을 마감한 사람도 있다. 그가 자신은 아니라고 진실을 밝혀대도 법정에서는 통하지 않았었다. 배심원도 판사도 검사도 아무도 그를 무죄라고 믿지 않은 상황에서 입만 아팠으리라.
이 사람이 어렵게 출감하면서 남긴 말이 “나는 운이 좋았다. 나처럼 살다가 감옥에서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핍박하는 사태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였다.
진실은 촛불이 아니기에 밝히고 말고 할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진실을 외치고, 나의 진실을 덮어두고 남의 진실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거철만 되면 소위 ‘진실 밝히기’에 혈안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사건의 진위에는 관계없이 진실공방 자체가 국민들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향도 있는데, 문제는 실제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중은 믿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선거철 진실공방’보다는 더 중요한 척도로 대권주자들을 판가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의, 능력, 애국심 등이다. 적어도 선거철에 난무하는 진실공방에서 거짓에 대한 해독제는 진실이 아니라 침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균희 / UCLA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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