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인근 인디언의 도움으로 1621년 가을 수확을 무사히 마치고 이들과 함께 축제를 벌인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초기 뉴잉글랜드의 역사를 살펴본다.
인구 비율로 따져 가장 참혹했던 싸움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신교 가운데서도 극단주의자들 모임인 청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일단의 그룹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는 감옥에 갈 필요 없이 종교 생활을 누릴 수는 있었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언어와 생각, 생활 방식에 있어 사실상 네덜란드인이 돼 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 공동체’라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신대륙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시작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한다. 원래 메이플라워호와 함께 떠나기로 했던 스피드웰호가 물이 새는 바람에 두 번이나 회항해야 했다. 수리를 하다하다 결국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원래 예정보다 인원이나 물량을 반으로 줄인 채 메이플라워호 혼자 떠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항해를 후원하기로 한 상인협회가 청교도가 아닌 보통 영국인을 대거 끼워 넣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은 이질적 요소가 섞이게 된다. 이는 항해 도중은 물론 신대륙에 정착해서도 내내 분란의 요소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종교적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원래 허드슨 강 인근 지금 뉴욕 근처에 정착하려던 이들은 워낙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거기까지 못하고 그보다 훨씬 북쪽인 케이프 카드에 닻을 내리게 된다. 이들이 발을 디딘 뉴잉글랜드 일대는 이미 유럽인들이 여러 번 다녀간 곳이다. ‘카드’(대구)란 지명이 말해주듯 어류가 풍부해 유럽 어선들이 고기를 잡으러 왔고 원주민들과도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원주민들에게는 재난이었다. 면역성이 없는 유럽 질병에 접한 이들은 수없이 죽어나갔다. 그 결과 한 때 수 만 명의 인디언들이 살던 뉴잉글랜드 해변 일대는 거의 폐허로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은 인디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거나 배 위로 유인해 사살하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영국인들은 탐험대를 파견, 인근 지역에서 인디언들이 숨겨놓은 옥수수 씨앗을 훔쳐왔다. 내년에 먹고 살 식량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지역 인디언들의 분노를 샀음은 물론이다. 겨울 추위와 기아, 적대적인 인디언들에 둘러싸여 전멸 일보 전까지 갔던 이들을 구해준 것은 왐포노악 족의 추장 마사소잇과 스콴토라는 인디언이다.
한 때는 이 지역의 맹주였으나 전염병으로 부족의 수가 대폭 줄면서 경쟁 부족인 나라간셋으로부터 찬밥 신세가 된 마사소잇은 철제 무기를 갖고 있는 영국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옛 위상을 되찾으려 한다. 영국인들에게 옥수수 심는 법을 가르친 스콴토는 원래 인근 지역 원주민으로 영국 선박에 의해 잡혀 노예로 스페인에 팔려갔다가 자기 고향으로 탈출해 돌아온 인물이다. 영어에 능통한 그는 초기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의 통역으로 이들이 살아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인근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식량과 농사짓는 법을 배운 정착민들은 1621년 가을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고 인디언과 함께 축제를 벌인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이렇게 쌓은 인디언과의 우호적 관계는 54년간 계속되며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인디언들로부터 모피를 사가던 식민지인들은 점차 땅을 팔 것을 요구하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종용한다. 자신들의 영토가 줄어들고 교회에 나가는 인디언이 늘어나면서 식민지인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 때 그 동안 쌓여온 적개심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1675년 일어난다.
하버드대에서 교육받은 존 사사몬이라는 인디언이 마사소잇의 아들 메타콤(식민지인들 사이에는 필립 왕으로 알려짐)이 인근 부락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식민지인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 후 곧 사사몬은 암살되고 3명의 인디언이 범인으로 지목돼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러자 메타콤은 인근 부족을 결합,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한 때는 뉴잉글랜드 식민지 존립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인디언들은 물량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고 1년 뒤 메타콤이 살해되면서 전쟁은 끝난다. 메타콤은 사지가 잘리고 머리는 수 년 간 효수 되는 벌을 받는다.
‘필립 왕의 전쟁’으로 불리는 이 싸움으로 이 지역 마을 1/3이 폐허가 되고 인디언과 식민지인 포함 5,000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7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 지역 인구의 1/14에 달하는 숫자로 인구 비율로 따지면 미 역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지금은 아득한 옛날 일로 대다수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인종 간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건이다.
‘메이플라워’
1620년 11월 9일 메이플라워호는 두 달간에 걸친 힘든 항해를 마치고 지금 보스턴 인근 케이프 카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혹독한 첫 해 겨울을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체의 절반에 불과했다. 한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 아무 도움도 청할 곳도 신천지에 대한 정보도 없는 황무지에 와서 절반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이들보다 더 조건이 좋은 남쪽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은 처음 수년 동안 치사율이 90%에 달했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이들이 온갖 악조건을 이기고 살아남았는가를 쓴 책 중 최근 발간돼 주목받고 있는 것이 너대니얼 필브릭의 ‘메이플라워’다. 미국의 남태평양 탐험기인 ‘영광의 바다’ 저자이기도 한 필브릭은 이 책에서 전쟁 중에서도 소수이지만 식민지인과 인디언 모두 서로가 똑같은 인간임을 알아보고 평화공존을 모색하던 사람들의 고뇌를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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