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주(상항한국학교 교사)
딸아이는 자기 몸집만한 핑크색 여행용 가방과 두툼한 슬리핑백을 현관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곤히 잠이 들어 있다. 저녁 내내 준비물을 적은 종이를 여러 번 확인해 가며 친구들과 가는 일주일의 여행에 들떠 있더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보수적인 아빠 덕분에 제대로 된 슬립오버 파티조차 해보지 못한 딸아이는 중학생이 된 후, 학교에서 수업의 연장으로 실시하는 outdoor school, 즉 일종의 수학여행인 이번 여행을 몇 달 전부터 무척 기다리는 눈치였다. 딸아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는 공식적인 첫 외박 인 셈이다. 아이가 집을 비운 동안 밀려있던 집 안 일들을 말끔하게 해치울 요량이었는데, 막상 딸아이를 태운 파란색 스쿨버스가 떠나고 나니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 것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모든 에너지는 딸아이에게 쏟아졌다. 딸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게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나의 모토였는데 어느새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고 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빈 방을 보면서, 대학 간 자녀들이 곁을 떠난 뒤 한동안 무얼 할 지 몰랐다던 선배 엄마들의 푸념들이 이해가 되었다. 자녀들이 떠난 뒤 생긴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를 새로운 인생의 기점으로 삼고 다시 분주해 지기 시작하는 선배 엄마들의 모습들이 딸아이의 짧은 여행을 계기로 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딸아이와 남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다보니 정작 시간과 여유가 주어져도 어찌 할지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를 찾는 딸아이나, 자는 아이 얼굴을 몇 번씩은 들여다봐야 안심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 모녀의 관계가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교육자인 도로시 피셔는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댈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했다. 아직 사춘기의 터널을 다 지나지 않은 아이를 둔 엄마의 입 찬 소리일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집을 떠나고 난 후 애완동물에게나 헛헛한 마음을 쏟고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딸아이의 여행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아이를 싸고돌지 말자. 나는 나대로 저는 저대로 홀로 설수 있게끔 지금 부터라도 연습을 해야겠다. 남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도록 삶의 밑천이 되는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될 기회를 빼앗지 말자. 자식을 위해, 자식을 통해 사는 게 아니라 자식에게 잘 사는 본보기를 보여 주자.’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신이 나서 떠났던 모습과는 반대로 피곤에 지쳐 돌아 온 딸아이의 모습을 보자 이 견고한 다짐과 반성은 순간 무너져 버렸다. 집이 최고고 엄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그 말에 지난 일주일 동안 다잡았던 마음이 풀어진다.
다시금 너는 내 기쁨이요 내 걱정덩어리임을 확인하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여행 후 이틀 내리 잠만 잔다. 깨어나자마자 배고프다며 툴툴댈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래, 아직 몇 년 만 더 이 즐거움을 느끼자. 나중일은 나중에...”라고 생각하며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우리 모녀관계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