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에 봤던 한국 영화 ‘내 머릿 속의 지우개’는 노인성 치매 질환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에 기억을 서서히 잃어 가는 젊은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의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잊어가며 나중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도 기억하지 못했을 때 나는 슬펐었다.
영화이긴 하지만 나이 들어도 여전히 분위기 있는 배우 정 우성 과의 결혼생활을 어찌 잊을 수 있었는지...방황하는 청춘의 고뇌를 그렸던 영화 ‘비트’에서 젊은 날 그의 모습은 얼마나 멋있었던가. 미혼시절, 그 영화를 본 후, 일반 남자들이 눈에 들어 오지 않아서 나는 오랫동안 외롭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영화 속 이야기가 나에게도 요즘 일어나고 있다. 지난 날의 과오와 상처들로부터 자유로와져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을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그 분은 나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 해 주시는 것일까? 날마다 새롭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제 일도 기억이 나질 않고, 그저께도 내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읽었던 책도 다시 읽어 보면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새롭고, 들었던 이야기도 다시 들으면 처음 듣는 것 같고, 아이들이 속을 뒤집어 놓았어도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고, 이미 알고 있던 것도 모르겠고……그렇게 모든 것이 새롭다. 주님은 어떻게든 기도를 들어 주신다더니 이 치매의 은사로 나를 변화시켜 주시며, 나로 하여금 날마다 새롭게 살아 가도록 해주시려는 것일까?
기억만 나지 않는게 아니다. 이제는 자주 쓰던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친구의 아들을 병문안 가서는 ‘식물인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아들이 ‘야채인간’이 되서 어쩌면 좋냐고 위로했다는 말이나, ‘육십 회갑잔치’가 생각 나질 않아 ‘육갑잔치’는 안할거냐고 물어 봤다는, 세상에 떠도는 유머들이 남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이 이렇게 오락가락 해도, 육신이 멀쩡하면 그나마 고생을 덜 한다는 것을 나는 지난 겨울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었던 한달 동안 뼈 저리게 깨달았다.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양파가 필요해서 목발을 짚고 차고까지 간신히 갔는데, 내가 무엇을 가지러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게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양파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 낸 후 차고로 가서 양파를 잡았지만, 양 손에 목발을 짚었기에 양파를 손에 들고 갈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양파를 담아 들고 갈 비닐 봉지는 보이지 않았고 다시 비닐봉지 가지러 목발로 왔다갔다 하기 싫었던 나는 양파를 입에 물고 왔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예전 일제 치하 시절이나, 육이오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는 하셨다. 방금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을 못 했지만, 예전 그 삶의 시절로 돌아가서 어느 때는 기뻐했고, 어느 때는 슬퍼하며 다시 그 시간들을 잠시 살아내는 듯이 헤매셨었다. 만약 먼 훗날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온다면……나는 내가 살아낸 생의 어느 언저리를 헤매고 있을런지……
하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의 일은 오늘 걱정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이제는 그저 그 날 그 날 아프면 아픈대로, 기쁘면 기쁜대로 가슴 가득 떠 안고 그렇게 순응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 가고 싶기 때문이다. 비 내리면 비 내리는 대로, 햇빛나면 햇빛나는 대로 즐기며 살기에도 생은 짧고 순간이기에,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단지, 오랫만에 옷 차려입고 집을 나가면서 내가 어디 가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언제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 마지막 날 내가 가야할 그 곳이나 길 잊어먹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고, 제대로 잘 찾아갔으면 하는게 나의 유일한 바램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