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우수정 /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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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국의 어느 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할 때의 얘기다. 내가 속해 있던 팀에 신입사원 두 명이 들어왔다. 하루는 그 두 사람이 뭔가를 앞에 펼쳐 놓고 한바탕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샘플 프로그램이었다. 그 당시 은행 입출금에 관한 신입사원 교육용 프로그램 용지였는데, 말하자면 그 의미에 관해 둘이 의견을 나누고 있는 거였다. 갓 입사한 두 사람인지라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그들의 대화는 둘 다 곁길로 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가 있었다. 그래도 열심으로 나름의 의견을 서로에게 강력히 피력하고 있었는데, 대화 못지않게 표정 또한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숙연하기조차 했던 그들의 진지한 대화는, 오히려 그 진지함 때문에 코믹함을 자아냈는데, 그게 아니라고 참견을 하기엔 분위기가 너무도 진지한지라 중간에 불쑥 끼여들기가 좀 그랬다. 결국 정답을 알고 있던 연수 담당 대리로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는 이유로 뒤통수를 된통 얻어 맞고는 이내 그들의 진지하고 지루한 토론은 종결되었다.
십년도 넘은 그 때의 장면이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난 건, 정답이 없는 어떤 주제를 놓고 친구와 한참 설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나도 진지했고 그 친구도 진지했다. 나는 나대로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한참 열변을 토하는데, 순간 ‘데쟈브’ 와도 같이, 나와 그 친구가 창출해 내는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과거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그 때 그들처럼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고 있는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기분이 고약해졌다. 그런 느낌이 드니까 또 이런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쯧쯧, 나가도 너무 나갔어… 정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되지도 않는 열변을 토하고 있는 우리의 터무니 없는 진지함을 내려다보며 쿡쿡 실소를 머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만 김이 새면서 팽팽하던 나의 주장에 슬그머니 바람이 빠져 버렸다.
사실 나는 진지한 사람을 좋아한다. 삶을 대하는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런 사람에게는 열정도 느껴진다. 열정이 있는 사람에겐 방향도 있다. 헌데 그 방향이 틀린 방향이라면? 가야 할 방향이 아니라면? 엉뚱한 방향으로의 열정과 진지함이란, 마치 십 수년 전 그들의 모습처럼 진지한 코메디가 되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재미없는 진지한 코메디. 게다가 기껏 죽자꾸나 산을 오르고 나서 여기가 아닌가배? 하는 황당함이 혼자의 몫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를 쫓던 사람들의 황당함은 또 어쩔 것인가.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이란 게 애당초 중구난방의 그것이 아닌 이상 분명한 방향이 있을진대, 그렇다면 그 방향은 대체 어느 쪽이란 말인가.
일껏 진지하게 살아 온 삶 위에 이런 도장이 쾅 찍힌다면 그건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진.지.하.게. 틀.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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