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자고 깨면 들려오는 이라크 병사들 사망 소식에 처음엔 그렇게도 마음이 아리더니, 이제는 그 느낌마저 희미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어미의 마음은 지금도 하루가 천년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 나의 마음 편함이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예전엔 그저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던 전쟁이 지금은 영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건 나도 아들을 둔 어미이기 때문일까. 아직 채 꿈을 펴보지도 못한 젊디 젊은 병사들의 죽음을 나래비로 신문에서 대했을 때, 그 사진 속 얼굴들은 단지 생면부지 누군가의 아들들이 아닌 내 아들의 모습으로 잠시 오버랩 되었었다. 시퍼렇게 살아 있던 아들의 모습을 사망소식과 함께 실린 사진들 속에서 발견했을 때의 그 어미의 후들거리는 가슴을 어찌할까. 한 군인의 죽음이 한 아들의 죽음으로 내게 다가오면서 그놈의 빌어먹을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대책 없이 미워졌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고통의 행렬은 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일까…
투철한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어린 시절, 6월만 되면 종종 반공 표어를 지어내거나 반공 포스터를 그려내곤 했다. 어린 학생답게 유치한 반공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던 나는 으레 공산당이라고 하면 붉은 얼굴에 머리에는 뿔이 달린 괴물을 그려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허구한 날 그들을 빨갱이라고 불렀고, 바로 그 빨갱이는 입에 담기만 해도 부정이 탄다고 생각될 만큼 내겐 터부시된 존재였다. 빨갱이에 당할 만한 흉물스런 괴물의 이미지가 따로 없었다.
바로 그 괴물에게 당당히 대항하듯 “난 공산당이 싫어요!”를 힘차게 외치고 죽어간 이승복 어린이를 영웅시 하던 시대였으니 나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포스터도 그런대로 먹혀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6.25 전쟁 당시 혈혈단신 월남한 아버지와, 세 딸들을 이북에 두고도 월남할 수 밖에 없었던 한 많은 할머니의 영향 아래 자란 까닭에 붉은 색깔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자라온 터였다. 대학교에 가서야 사회주의가 뭔지 좌익이 뭔지 운동권 친구들의 어깨 너머로 들을 수 있었고 사상과 이념만 다를 뿐 소위 빨갱이란, 얼굴이 불그죽죽하지도 머리에 뿔이 나지도 않은 나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무슬림들을 향한 나의 생각은 예전 공산당을 향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공산당을 생각했던 거 마냥 똑같은 무지로 일관해 왔다. 무슬림들은 그저 테러나 suicide bombing이나 해대는 흉칙하고 광적인 집단으로 말이다. 부분을 전부로 알고 덤비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또 있을까 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전쟁으로 희생되는 이쪽 저쪽 군인들은 둘째 치고 라도 아무런 명분도 없이 죽어가는,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정을 지닌 이라크 사람들의 비극 또한 참으로 기막히다.
전쟁의 깊은 속을 잘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든, 사람의 존엄성을 패대기 치는 무슨 무슨 주의라든가 신념, 이해타산 따위는 가라!고 외치고 싶다. 기가 막히게 맑은 6월 하늘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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